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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송승현 기자] “(검찰은)흡사 조물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300여 페이지나 되는 공소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공소사실은 무에서 무일 뿐입니다.”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은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재판장 박남천) 심리로 열린 보석심문기일에서 검찰의 공소장에 대해 이같이 비난하며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義)’ 위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무색하게 지난 2009년 대법관 시절 양 전 원장은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공소사실을 특정하기 위해 그 배경과 과정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정반대 목소리를 냈다.
◇검찰 공소장 작심 비판…梁 “소설이자 픽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법리적 주장은 검찰의 공소장 일본주의 위반이다. 공소장 일본주의란 ‘검사가 기소할 때 원칙적으로 공소장 하나만을 제출해야 하고 재판부가 예단을 갖게 할 수 있는 기타 서류 등을 첨부·인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양 전 원장도 이런 주장을 하는 대열에 동참했다. 그는 보석심문 기일에 이어 자신의 첫 공판기일에서도 “검사들이 정력적으로 공소사실을 말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근거가 없고 어떤 건 소설·픽션 같은 이야기다”며 깎아내렸다. 그러면서 “(검찰의 공소장은)법률가가 쓴 법률 문서라기보다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 자문을 받아서 쓴 한 편의 소설이라고 생각될 정도”라고 폄하했다.
실제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사법행정권의 한계, 상고법원 도입을 둘러싼 당시 사법부의 대내외적 환경, 내부 비판세력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의 출범 등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와 관련된 배경과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양 원장 측은 이같은 공소사실에 대해 혐의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설명을 상세하게 써 놔 재판부가 유죄 심증을 갖게 할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장황한 공소장, 피고인 방어권에 유리” 판시한 ‘대법관 양승태’
1982년 형사소송규칙이 제정될 당시부터 존재했던 공소장 일본주의는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된 조문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공판중심주의를 중시하던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대표가 18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공천 대가로 6억원 상당의 당채를 저리로 발행, 경제적 이득을 얻은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및 정치자금법 위반)로 기소된 사건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1·2심 재판부는 문 대표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대법원도 원심을 확정했다. 문 대표 측은 공소장에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을 인용하거나 범행 배경을 써넣은 것은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라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9년 10월 당시 양 전 원장을 비롯한 9인의 대법관은 다수의견을 통해 “정당 내부에서 은밀하게 벌어진 일이기에 범행 동기와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검사가 구체적인 사정을 적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양 전 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3200자에 달하는 보충의견을 통해 “심판의 대상이 특정됨과 동시에 입증 대상과 심리 방향도 정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기재는 오히려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를 용이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양 전 원장은 자신이 밝힌 의견과 배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검찰은 양 전 원장의 당시 판결을 언급하며 “(사법농단 사건은) 6년 동안 지휘체계와 계통에 따라 은밀하게, 조직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이뤄진 범행인 탓에 공소장에 범행 동기 서술 등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반박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한편 양 전 원장의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공소사실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범죄로 인한) 결과나 영향 등이 기재됐다. 이는 법관에게 부정적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게 할 수 있다”며 검찰에 공소장 일부 수정을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