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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의경 40년 역사는 막을 내리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의경이 있다고 강조했다. 시위진압 중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17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2013년 숨진 고(故) 김인원(당시 20세·일경)씨가 그 주인공이다. 고 계장은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고 국가 시스템이 궤도에 올랐음에도 병역을 빌미로 청년들의 노력을 무상으로 받았다는 점은 뼈아픈 부분”이라며 “그런 어려움에도 우리 경찰과 같이 일해줘서 정말 영광이고, 저만큼은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98학번으로 이른바 IMF세대인 고 계장은 경찰대 졸업 후 2002년 경위로 입직해 처음 맡은 보직이 기동대 소대장이었다. 의경들과 경찰 생활을 시작해 올해 22년 차가 된 그는 내부에서 험지로 꼽는 경비 업무만 15년째인 ‘경비통’이다. 경찰 생활 7할을 본청(경찰청)에서 보낸 고 계장은 “우리끼리 경찰청에서 제일 어려운 곳이 경비국이라고 한다”며 “경비국에서도 가장 어렵고 꺼리는 일이 생기면 모두 저한테 오더라”고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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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근무 등 장점에 ‘의경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의경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 계장은 “마지막 기수는 후임을 받지 않아 지원할까 걱정했는데 경쟁률이 34대 1로 마지막까지 인기가 좋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경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 계장은 “1980~90년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시위대에 두들겨 맞아 불구가 되는 전·의경들도 있어 지원을 기피하는 분위기였다”며 “당시엔 지원자가 없어 각 지방청과 경찰서마다 의경 모집을 담당하는 경찰관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후 경찰은 2012년을 기점으로 TF를 꾸려 선임이 후임에게 특정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군대폭력의 상징인 ‘깨스’와 구타 등 가혹행위를 근절하는 생활문화 개선 조치를 단행했다. 고 계장은 경찰과 군 복무를 했던 의경들이 직업 경찰관이 되기도 한다는 일화를 들며 “군대문화 혁신 결과 의경 경쟁률은 최대 70대 1까지 치솟았다”고 강조했다.
1982년 12월 도입된 의경은 교통과 방범 등 경찰의 치안 업무를 보조했다. 2013년 전투경찰(전경)이 폐지된 이후에는 집회·시위 관리까지 도맡으며 국민 안전을 지키는데 일조했다. 군 병력 부족 등을 이유로 정부가 2017년 의경 감축·폐지를 발표하면서 2021년 985명을 마지막으로 선발했다. 이로써 의경의 상징이었던 무궁화 꽃봉오리 1개 계급장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