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이번엔 ‘노인’이다. 더군다나 치매에 걸린 70대 노모라니. 배우 이재은(36)이 올해 첫 작품으로 선택한 연극 ‘숨비소리’의 역할이다. 치매를 앓는 백발노인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항상 다니던 길을 잊고, 공원 한복판에서 볼 일을 보는 등 90여분 동안 한 여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집중한다. 극이 시작되면 포스터 속 흑발의 배우 이재은은 온데간데 없다. 힘을 빼고 툭툭 던지는 대사 끝엔 내공이 담겨 있다. 30년 연기인생의 무게가 오롯이 읽힌다.
◇“연기는 끝없는 배움”
1986년 드라마 ‘토지’의 어린 서희 역으로 일약 스타가 됐을 당시 고작 여섯 살이었다. 다섯 살 때 ‘적도전선’으로 데뷔, 이듬해 ‘토지’에서 어리광 부리는 어린 서희로 등장해 시청자의 시선을 끌었다. 이후
|
“어린 나이에 큰 사랑을 받았지만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을 잃었다. 그만큼 배울 수 있는 시기도 놓친 셈이다. 방송에서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과거 친한 PD도 모두 세대교체 됐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경력도 많다 보니 어린 PD들은 나를 어려워 하는 분위기다. 차라리 현장무대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워 나가는 중이다.”
이번 역할도 그 연장선이라는 게 이재은의 얘기다. “내 나이에 못하는 연기를 도전하기도 하고 내 나이에 맞는 역할도 맡아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관객과 호흡을 맞추고 스태프들에게 배운다. 배우로 남고 싶다. 배우라는 수식어가 가장 좋다.”
◇치매 앓던 외할머니 떠올리며 연기
“연극을 보고 난 관객들이 ‘부모님께 전화 한 번 해볼까’라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연기 욕심과는 달리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소박했다. 하지만 이재은은 구태여 과장해 연기하지는지 않았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치매로 돌아가셨다. 당시에도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치매에 걸린 당사자는 정말 진지하고 대부분은 순수하지 않나”고 되물었다.
‘숨비소리’는 해녀가 물에서 나올 때 뿜는 깊은 숨소리로 제주도 방언. 어머니의 한을 숨비소리에 빚대, 우리네 어머니의 들숨과 날숨의 깊은 숨소리를 들려 드리고 싶다는 게 이재은의 생각이다.
“숨비소리는 한 어머니의 맺힌 한일 수도 있지만 그냥 삶 자체일 수도 있다. 대사 중에 ‘아들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줘 고맙다’가 있다. 노모가 제정신에 아들에게 해주는 그 말 한 마디에 울고 가는 관객이 많다. 돈을 좇고 싶지는 않다. 따뜻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고두심·메릴 스트립 닮고파
아역시절부터 시작해 어느새 30년차 연기생활에 접어든 이재은에게도 롤 모델이 있다. ‘고두심’과 ‘메릴 스트립’이다. “두 배우는 어떤 역할이든 잘 어울린다. 국민 어머니든 소탈한 아줌마든. 마치 팔색조 같다. 고두심 선배와 메릴 스트립처럼 연령대를 떠나 연기할 수 있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되고 싶다.”
먼 미래의 꿈도 밝혔다. “마음에 맞는 연출가, 작가 등과 의기투합해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한국적이면서도 새로운 콘텐츠를 창작하고 싶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남편과 장르 파괴적인 새로운 예술무대를 선보이는 것이 꿈이다.” 남편 이경수 씨가 제작에 참여한 연극 ‘숨비소리’는 다음달 1일까지 서울 이화동 대학로 예술마당 1관에서 이어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