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으라, 언젠간 좋은 날이 올 테니[정덕현의 끄덕끄덕]

최은영 기자I 2024.11.21 05:00:00
[정덕현 문화평론가] 아들이 군대에 갔다. 100일이 조금 지난 후 가족초대 행사가 있어 배치받은 부대에 갔다. 아들이 먹는 짬밥을 같이 먹고 아들이 걸어 다녔을 길을 같이 걷고 8명이 함께 지내는 생활관도 둘러봤다. 확실히 옛날 군대와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게 곳곳에서 느껴졌다. 먹는 것도 자는 곳도 또 옷가지 등 사용하는 물품들도 좋아 보였다. 군부대가 그런 행사를 하는 건 아무래도 자식을 보낸 부모 입장에서 걱정되는 마음을 풀어주기 위함일 게다. 실제로 보고 나니 막연한 걱정은 사라졌다. 하지만 군대가 얼마나 나아졌든 앞으로 두 해 가까이 아들을 낯선 곳에 보내야 하는 부모 마음은 헛헛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고선웅 연출의 연극 ‘퉁소소리’를 보는데 그 소회가 남달랐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최척과 그의 아내 옥영 그리고 그 가족이 겪는 이별과 만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감히 우리 가족의 소소한 이야기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목숨이 오가는 진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최척의 운명은 그 원작이 소설이어서 가능했을 기적을 동원해서야 겨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처럼 지구 한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전쟁에 아들을 보내고 애타는 부모 마음 정도는 더 실감 나게 헤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좋아진 군대에 아들을 보내는 부모조차 마음이 이토록 헛헛한데 실로 전쟁에 아들을 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오죽할까.

‘퉁소소리’는 조선 중기 명필로 잘 알려진 조위한이 1621년에 쓴 소설 ‘최척전’을 원작을 각색한 연극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거치던 전쟁 상황에 최척과 옥영 그리고 그 가족들이 겪게 되는 이별과 만남의 이야기를 담았다. 최척과 옥영은 그저 평범하게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을 수도 있는 부부였다. 함께 달밤에 주막에서 한 잔씩 걸치고 최척은 퉁소를 불고 옥영은 거기 맞춰 시를 짓는 그런 행복한 부부의 삶 말이다.

임진왜란 시기 최척은 의병으로 차출돼 가면서 혼례를 약속한 옥영과 아픈 이별을 하게 된다. 옥영의 엄마는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최척을 잊고 돈 많은 다른 집 자제와 혼인하라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굳건해 겨우 혼례를 치른다. 몽석이라는 사내아이를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정유재란이 터지면서 피란길에 오르다 이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최척은 가족이 모두 죽은 줄 알고 실의에 빠진 채 명나라 군사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가게 되고 옥영은 남장을 한 채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가게 되지만 마음씨 착한 상인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남는다. 중국에서 천지를 유랑하며 떠돌던 최척은 거기서 만난 중국인 친구와 바닷길로 장사를 하러 다니다 안남(베트남)까지 가게 되고 그곳에서 퉁소를 부는데 익숙한 시구가 들려온다. 그건 다름 아닌 옥영이 어느 달밤에 읊조렸던 시구다. 최척은 기적적으로 옥영을 만나고 함께 명나라로 들어와 살게 된다.

하지만 행복했던 나날들은 또다시 전쟁으로 깨지게 된다. 후금이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자 명나라는 이들을 제압하려 군대를 보내고 최척은 또다시 명나라 군사로 징병된다. 하지만 후금을 얕잡아본 명나라 군사들은 대패하고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최척은 조선군에 의탁하지만 그들 모두 후금에 포로로 잡힌다. 그곳에서도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끝내 살아남은 최척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몽석을 만나 조선땅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편 명나라가 대패했다는 소식에 남편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며 절망하던 옥영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살아 있다면 조선으로 갔을 거라 확신한 옥영은 배를 준비해 아들, 며느리와 함께 바닷길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조선땅으로 돌아오고 고향에서 결국 남편과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조선 시대에 썼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조선, 중국, 일본, 베트남까지를 오가는 엄청난 대서사를 담고 있지만 ‘최척전’이 포착하고 있는 건 전쟁 같은 거대서사 속에 대부분 가려지곤 하는 실제 민중들의 치열한 삶이다. 지금도 전쟁이 터지면 병력 몇십 만으로 퉁쳐지는 그런 표현 속에 가려지곤 하는 누군가의 아들, 딸이 있었고 그들은 그 빗발치는 운명의 화살 속에서 저마다 절박하게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누군가는 끝내 살아남아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약 400년 전의 ‘최척전’이 소설을 빌려 보여주려 한 게 바로 그것이고, 현재 그 작품을 가져와 그런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게 연극 ‘퉁소소리’다.

“최근 러시아로 파병된 북한 군인 가족에게도 슬프고 기막힌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퉁소소리’를 각색 연출한 고선웅 연출가는 말했다. 그 말 그대로 러시아에서 전장으로 보내진 군인들도 있을 것이고 우크라이나에서 침탈당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투입된 군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라는 한마디로 그렇게 보내지지만 그 누가 자신의 가족을 사지로 보내는 걸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쟁은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최척과 옥영 같은 민중들의 고통이 생겨난다.

그래서 무려 세 개의 전쟁이 겹쳐져 있는 그 긴 서사를 통해 끝내 ‘퉁소소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승리하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대신 ‘살아 있으라’는 것이다. ‘버텨내라’는 것이다. 때론 버텨내는 것조차 힘겨운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이 작품은 말한다.

그렇다. 자식을 먼 곳으로 떠나보내게 된 부모들 중 그 누구도 그 자식이 어떤 성과를 내고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몸 건강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도대체 승리나 성취가 뭐 그리 중요할까. 그러니 아들아. 이 아비는 바랄 게 없다. 무사히 마치고 몸만 건강히 돌아오면 그만한 행복이 없을 테니.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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