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피해는 국민들이 볼 것"…현직 판사들 '근심·울분'

한광범 기자I 2021.09.06 07:00:00

임용경력 5년 유지법안 부결에 공개적 우려 쏟아내
"판사수 감소→판사 업무가중·재판장기화 불가피"
"법조일원화 실현 전제조건 논의도 없이 밀어붙여"
"선악구도 만들고 법원을 반개혁세력으로 내몰아"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대법원장이 신임 법관에게 임명장 수여 후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결국 피해는 판사들이 아닌 재판 당사자들인 국민들이 볼 것입니다.”

판사 임용 최소 법조경력을 현재와 같이 ‘5년’으로 유지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지난달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된 것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법안 부결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현직 판사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2013년 본격화된 법조일원화 정책으로 판사는 일정 정도의 법조경력이 있는 법조인 중에서 선발된다. 판사 최소 법조경력은 2013년 3년을 시작으로 2018년 5년, 2022년 7년, 2026년 10년으로 순차 확대된다. 과거 다른 법조 경험 없이 사법연수원을 수료 후 곧바로 판사로 임용되던 시스템에 변화를 준 것이다.

하지만 법원 내부에선 현실을 반영해 법조경력 확대를 현재와 같이 5년으로 유지해줄 것을 강력 희망해왔다. 법조경력 10년 이상 법조인들이 법원으로 자리를 옮길 유인이 크지 않다는 이유가 작용했다. 소속 기관에서 이제 막 인정받기 시작한 법조인 중 임금은 작고 업무강도는 훨씬 강한 법원으로 누가 오겠냐는 현실적 우려가 작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법원 내부에선 기존 법조일원화를 유보하되 우수한 경력 법조인들을 법원으로 끌어올 수 있도록 제도와 처우 개선을 우선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경력 10년 이상 지원자 연평균 18명 불과

실제 법조일원화 시행 이후 경력 10년 이상 법조인 지원자는 8년간 총 147명으로 연평균 18명에 불과했다. 임용된 신입 판사 내 비율은 △2013년 0명 △2014년 1명(1.4%) △2015년 3명(2.8%) △2016년 0명 △2017년 0명 △2018년 5명(13.9%) △2019년 5명(6.3%) △2020년 5명(3.2%)에 그쳤다. 지원자 수도 적은 데다가 그중에서도 판사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적은 것이다.

법조경력자 법관 임용 현황. (자료=대법원)
7년 미만 법조인 지원이 불가능해지는 내년부터 당장 판사 수 감소가 예상되고 있다. 판사 증원이 필요한 시점에 퇴직 판사 수보다 임용 판사 수가 작아지는 상황이 이어져 올해 3115명인 판사 수가 2029년엔 2919명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것이 대법원의 전망이다. 판사 수 감소는 당장 판사 1인당 사건 수의 증가로 이어진다. 사건 수 증가로 판사의 업무 가중되며 재판 장기화도 불가피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이 최종 관문인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법원 내부는 적잖이 충격을 받는 모습이다. 소셜미디어 등에 공개적으로 우려를 드러내는 판사들도 늘고 있다.

강민구(사법연수원 14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결국 국민과 소송 당사자, 대리인 모두가 피해자가 될 것”이라며 “경력법관 보수 대우에 대한 고민은 아예 접어두고 개정안을 거부한 결과는 향후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심준보(20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추후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가서야 ‘재판이 오래 걸린다’, ‘이상한 판결이 너무 많다’는 얘기가 나오고 판사 수를 늘리라고 할 것”이라며 내다봤다.

◇“판사 수 증원 위한 경력완화는 대다수 판사들 생각”

김명수 대법원 체제에서 법원행정처 기획1심의관으로 근무했던 김용희 울산지법 부장판사(34기)는 “진지하게 법조일원화를 실현하고자 했다면, 법조일원화 당시 논의됐던 재판 인력의 획기적 증원과 판사 근무여건의 파격적 개선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국회는) 예산을 늘려 판사의 격과 처우를 미국 같은 법조일원화 국가 수준으로 올려주고 늙은 판사들에게 재판연구원을 2~3명씩 제공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며 “그렇게 하며 법조일원화를 추진한다면 반대할 판사도 없다”고 강조했다.

현행법에 따른 2021~2029년 판사 수 예측. (자료=대법원)
그는 “정치권이나 국민들이 판사의 파격적 처우 개선을 지지해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법원 스스로 그쪽은 포기하고 판사 수라도 늘려 제대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임용 요건 완화를 요청했던 것”이라며 “이는 격무에 시달리며 졸속 재판과 사건 적체에 답답해하는 대다수 일선 판사들의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김 부장판사는 법안에 반대하거나 기권한 의원들을 향해 “그들은 선악 싸움에 구구절절한 현실 이야기들이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선악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반개혁세력’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했다.

법원 내에서 개혁적 목소리를 내온 류영재(40기) 대구지법 판사도 “(개정안 부결로) 판사 증원은커녕 현재 판사 수만큼 현상 유지하기도 어렵게 생겼다”며 “재판을 신속하게 하기도 어렵고 충실하게 하기도 어렵고 기형적인 재판을 바로잡기도 어렵게 됐다”고 우려했다. 그는 “10년 이상 법조경력자에게 판사(직)는 매력적이지 않다”며 “법조계에서 10년 이상 뛰며 이제 좀 자리 잡은 법조경력자들이 무엇하러 판사 임용 시험공부를 하고 임용 후 전국을 떠돌며 과로사하기 딱 좋을 만큼 일하겠나”고 반문했다.

류 판사는 “우리 재판시스템은 30대 판사들의 과로로 버티고 있다”며 “이 업무량은 모든 판사들의 연령이 40대 중반 이상이 될 경우 절대 지속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조일원화는 판사 동질화와 관료화 해체의 중요 수단 중 하나로서 필요하다”면서도 “그 정착을 위한 전제조건들도 실현시켜야 하는데, 왜 그 부분은 논의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비판했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