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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각으로 15일 오전 4시께 미국채 10년물 금리는 1.618%를 기록 중입니다. 5일 연중 최고점인 1.73%로 마감한 뒤로는 1.7%대 이상 오른 적 없이, 1.6%대에서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금리가 최근 하락세에 있는 표면적인 이유로는 13일 존슨앤존스(J&J)의 코로나19 백신 투여를 중단하라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발표가 꼽힙니다. 안전 자산 선호 현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같은 날 실시된 240억달러 규모의 미국채 30년물 입찰에선 낙찰금리는 2.320%, 응찰률은 2.47배를 기록, 강한 수요가 확인됐습니다. 채권시장이 가장 두려워했던 3월 미국의 소비자 물가 지수(CPI)도 전문가들의 예상에서 0.1%포인트 상회한 0.6% 상승을 기록했습니다. 실제 물가 상승이 시장의 예상 범위 안에 있었던 셈입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는 시장이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미국 정부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는 풀이가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견해차를 좁혔단 얘깁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달 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의 실업률이 3.5%에 불과했지만 인플레이션 징후는 없었다”며 “만약 물가가 상승해 문제가 생길 경우에도 행정부가 대응할 수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일 10년물 1.5%대였던 금리는 1.6%대로 치솟았습니다. 이같은 3월의 불신이 최근 들어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최서영 삼성선물 연구원은 “3월 말을 기점으로 금융시장 색깔이 달라진 것은 장기 기대 인플레이션의 진정세”라며 “올해 나타날 물가 급등 국면이 추세적일 수 있다는 경계심이 낮아지고, 일시적일 것이라는 견해로 시장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 최근 변동성을 전반적으로 낮춘 배경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바이든 행정부의 증세 논의가 예상보다 빨리 시작된 것이 인플레이션을 둘러싼 심리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해석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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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는 어림없다’는 디플레이션파(派)의 논리도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우선 미국의 국가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정부와 중앙은행이 아무리 유동성을 퍼부어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단 주장이 있습니다. 힘코(HIMCO) 이코노미스트 겸 부사장인 레이시 헌트(DR. Lacy Hunt) 박사가 대표적입니다. 미국의 GDP 대비 신용시장 총 채무잔고(TCMDO)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약 388%으로 역대 최대 수준으로, 성장 저하를 일으킬 정도를 이미 넘어섰다고 합니다. 헌트 박사는 또한 인구 고령화의 문제도 지적합니다. 미국의 총인구 대비 경제활동인구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중반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용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고용이 늘면 사람들이 받는 임금도 늘어나 진정한 물가 상승이 일어나게 됩니다. 미국의 고용률은 지난해 3월 60.24%까지 빠졌다가 지난 2월 68.34%까지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코로나19 이전인 71.70%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쉬 샤피로 MFR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3월 고용지표에서 시간당 임금은 오히려 전달 대비 0.1% 하락한 것으로 나타나 전문가 예상치인 0.2% 증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4차산업 혁명도 디플레이션의 이유가 됩니다.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는 2030년까지 미국, 독일, 일본, 영국, 중국 등 8개 국가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인구가 1억명이나 된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고객서비스, 판매조직, 오피스 직군 등에서는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 전망이지만, 헬스케어, 기술, 크리에이터 등에서는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혁신산업에 적응하지 못해 구직을 포기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실업률은 더 커진단 얘기입니다.
이효석 SK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중앙은행이 돈을 풀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는 건 맞다”면서도 “그러나 유동성이 늘어나면서 생긴 유니콘 기업과 좀비 기업이 가져오는 디플레이션 압력도 만만치 않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유동성을 흡수한 금융시장의 지원을 받는 아마존과 쿠팡과 같은 유니콘 측에 있는 기업들이 서로 나서서 물건 가격을 낮추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유동성으로 죽지 않는 좀비기업들로, 없어도 될 공급이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는 지난 6일 캐시 우드(Cathie Wood) 아크 인베스트먼트 CEO가 트위터에 쓴 “오늘날 진화하는 기술 혁신은 역사상 다른 어떤 때의 혁신도 왜소하게 만들고 ‘좋은 디플레이션’과 폭발적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얘기기도 합니다.
혁신산업을 기존의 가치 평가 도구로 측정할 수 없다는 문제도, 디플레이션이 지속될 걸로 보이는 이유로 꼽힙니다.
이은택 KB증권 스트래티지스트는 “4차 산업혁명은 생산량(Q) 증가가 아니라 효율성(Welfare) 증대에 맞춰져 있는데, 기존 경제학자들은 기존 이론에 집착하며 느리게 움직인다”면서 “가령 GDP에는 오직 TV와 자동차 가격, 통신요금 만이 들어가지 거기엔 TV화질이 좋아지거나 통신기술 향산, 자율주행 혁신 등은 무시된다. 이 역시 장기 저물가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라고 전했습니다.
◇ 인플레派 ‘선반영’ 가능성
그럼 인플레이션파는 시장에서 사라진 것일까요. 채권시장에서 매수세가 나타나며, 금리가 하락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수그러든 게 맞는 듯합니다. 그러나 현 금리 수준을 ‘미국의 1조9000억달러의 추가 경기부양책과 2조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 등 현재까지 나온 시나리오를 근거로, 시장은 예상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을 모두 선반영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문제는 조금 달라집니다. 인플레이션파가 사라졌다기보단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현 미국 금리는 인플레이션 위험을 이미 다 반영하고 경기민감 업종 주가도 상반기 실적 개선 기대를 충분히 반영했을 수 있다”며 “이 경우 주식시장은 조만간 피크를 보일 위험이 있지만, 현재로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습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창업자인 레이 달리오(Ray Dalio)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대표적인 인플레이션파입니다. 그는 장기 부채 “(미국)채권에 투자하는 건 멍청한 일이다”며 “우리는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고 결국 인플레이션 압박이 연준의 금리 인상을 유발할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밖에 마이클 버리(Michael Burry) 사이온자산운용 창업자와 린 알덴(Lyn Alden) 애널리스트도 인플레이션을 주장하는데, 공통된 의견은 ‘미국 정부의 과도한 부양책이 통화량(M2)를 증가시킬 것이고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인플레이션이냐 디플레이션이냐는 ‘열린 결말’로 둬야 한다는 조언이 나옵니다. 최서영 연구원은 “연준과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 등 지난 25년간 저물가 시대와 현재 우리가 마주한 시대는 인플레이션을 둘러싼 구조적 환경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라며 “지금의 논쟁은 그 누구도 답을 내릴 수가 어려운 사안으로 섣불리 해답을 내는 것보다는 논쟁의 배경을 이해하면서 시장의 센티멘트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인플레이션보단 디플레이션 측의 논리들이 더 중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는 보입니다. 한 금융시장 전문가는 “바이든 재정정책 한 가지만 놓고도 인플레냐 디플레냐는 해석이 다를 정도로 전망 자체가 어렵다”며 “인플레 측은 경기 부양과 일자리 창출이 과도한 소비 등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 반면, 디플레 측은 부채가 쌓여 소비를 억제하게 될 것이고 정부가 돈을 써서 민간기업에 돈이 안 들어가는 구축효과가 나타나 하나마나한 것으로 비판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다만 흥미로운 지점은 인플레에 대한 논거들은 대부분 단기적인 얘기가 많고 디플레는 장기적인 게 대부분이긴 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