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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톡톡아트]엄친딸 아르테미스, 그러나 엄마처럼 살긴 싫어!

유경희 기자I 2012.08.15 09:00:00

사랑을 포기하고 평생 처녀로 살다

[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그리스 신화에는 유명한 처녀신 셋이 있다. 아테나(미네르바), 아르테미스(다이아나), 헤스티아(베스타)이다. 세 여신은 단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으며, 결코 남신들이나 남성들에게 굴욕을 당하거나, 강간을 당하거나, 멸시를 받은 적이 없다. 그리하여 이 세 여신만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강력한 힘에 휘둘리지 않고 열정과 성적 욕망, 낭만적인 감정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세 여신만이 첫눈에 반해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만큼 사랑과 성욕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테나와 아르테미스는 제우스가 불륜으로 낳은 특별히 사랑하는 딸들이고, 헤스티아(Hestia)는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누나이다. 그리스 신화는 시간의 개념도 근친상간의 개념도 없는 ‘날라리 족보’라서 부모자식, 형제지간에도 관계없이 사랑에 빠지곤 한다. 아테나와 아르테미스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진 헤스티아 역시 남동생 포세이돈과 조카 아폴론이 자신에게 구혼하며 다투자, 그럴 바엔 영원히 처녀로 살겠다는 맹세를 해 싸움을 가라앉혔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올림포스 12신 중 여섯 여신 가운데 아테나와 아르테미스와 더불어 처녀 신으로 남게 됐다. 그 후 헤스티아는 화덕을 지키는 가정의 수호여신으로 살았다. 헤스티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화덕’ 또는 ‘화로’를 뜻하는데, 화로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정의 중심이었으므로 이 여신은 가정의 수호신으로 숭배됐던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불은 얻기도, 보전하기도 힘든 생활필수품이었고, 불씨를 보전하고 전달하는 일이 여성이 맡은 가장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가정, 동네, 도시, 국가의 중심에는 언제나 불씨를 담은 화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헤스티아가 가정이나 공동체의 수호자로 간주되고, 고대에 연회 및 제사의 관장자로 숭배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스티아는 아테나와 아르테미스에 비하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데, 올림포스산에서 조용히 머물면서 주로 명상이나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헐렁한 옷에 헝클어진 머리 등 외모에는 도통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니, 남성들의 관심을 사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와 관련된 신화가 별로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아르테미스 역시 아테나 보다는 덜 알려져 있는데, 그녀는 아폴론의 쌍둥이 남매로서 고대 그리스 사회가 가부장적 세계였던 만큼 아폴론에 눌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게다가 제우스 바로 옆에는 똑똑하고 예쁘고 아버지밖에 모르는 딸 아테나가 있었으니,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은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다. 레토는 모든 조강지처들의 여신인 헤라의 분노로 델로스라는 척박한 섬에서 아이를 낳는다. 먼저 태어난 아르테미스는 아폴론을 낳기 위해 9일 동안 진통하는 어머니를 도왔는데, 어머니의 산파역할을 했기 때문에 출산의 여왕으로도 불린다. 그리스 여자들은 아이를 낳을 때 아르테미스를 부르며 진통을 멎게 해주기를 기도하거나, 아르테미스의 화살에 맞아 죽음으로써 진통이 끝나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로마시대조각
아르테미스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레토는 제우스를 찾아 올림포스신궁으로 간다. 제우스는 흡족해 하며 “여신들이 아르테미스 같은 아이만 낳아준다면, 질투심 많은 헤라의 분노가 무슨 걱정이겠는가? 아가야,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갖게 될 것이다.” 그러자 아르테미스는 활과 화살, 뛰어다니는 데 불편하지 않을 짧은 겉옷, 그리고 한 무리의 사냥개와 요정, 드넓은 산과 황야, 그리고 영원히 처녀로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제우스는 딸이 깊은 산속과 거친 황야에서 지낼 것은 좀 걱정스러웠지만, 처녀로 지내겠다는 말에는 내심 흡족해하며(세상 모든 아버지 역시 제우스처럼 딸의 독신을 내심 기뻐할 것이다) 딸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다. 아르테미스는 숲과 강가를 다니며 가장 예쁜 요정들을 직접 뽑았고, 바다 밑으로 가서 포세이돈의 기능공인 키클로푸스를 찾아가서 자신이 쏠 활과 화살을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손에 활을 들고 요정들을 이끌고서는, 반은 염소이고 반은 사람인 판을 찾아가서 가장 뛰어난 사냥개를 얻기까지 했다.

루벤스, 사냥에서 돌아오는 아르테미스, 1615,
이렇게 하여 아르테미스는 훤칠한 키, 짧은 토가를 입고 은빛 활과 화살통, 수많은 요정들과 사냥개를 이끌고 사냥하는 여자로 나타난다. 때로 그녀는 양손에 횃불을 들고 있거나 머리 위로 달과 별이 원을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르테미스의 외모는 아프로디테와 견줄 만큼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성격은 단호하고 조금 거친 편이었다. 예컨대 그녀는 재빠르고 단호하게 행동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구해주고 보호해준다. 반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배반하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이 잔인한 벌을 내린다. 아테나가 딸바보 아버지의 딸로 아버지를 무척이나 닮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아르테미스는 ·엄마딸·이다. 어쩌면 아르테미스는 어머니와 유난히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는 요즘 엄친딸과 비슷하다. 예컨대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처럼,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유별난 애착관계를 보이는 모녀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르테미스는 어머니 레토가 강간당하려 할 때 그녀를 구하고, 어머니가 자식자랑을 하는 니오베에 모욕감을 느끼자 아폴론과 함께 니오베의 자녀를 모두 죽였다. 이처럼 아르테미스는 어머니가 원할 때마다 찾아와 어머니를 도왔다. 다른 어떤 여신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이처럼 아르테미스는 어머니 편에서 일하지만 정작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여자들과 어울려 살았으니 말이다.

프랑수아 부셰, 목욕 후의 아르테미스, 18세기 로코코
또한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잔인하게 대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냥꾼인 악타이온이 숲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아르테미스와 요정들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던 것! 갑작스러운 악타이온의 침입에 화가 난 아르테미스는 악타이온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고, 그 물은 악타이온을 수사슴으로 변하게 했다. 악타이온이 몰고 온 사냥개들은 수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을 쫓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악타이온은 도망가려 했지만 사냥개들에게 물려 갈기갈기 찢겨 죽게 되었다.

티치아노 베셀리오,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 1556~1559년경
뿐만 아니라 아르테미스는 과도한 경쟁심 때문에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의 남자를 죽인 일이 있었다. 바로 오리온이 그 남자다. 이 살인은 아르테미스가 오리온을 사랑하는 것에 기분이 몹시 상한 쌍둥이 남동생 아폴론의 장난에 의해 실수로 저질러진 일이다. 어느 날 아폴론은 오리온이 머리만 내놓은 채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아폴론은 아르테미스에게 검은 물체를 지적하면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화살로 맞출 수 없을 거라고 비아냥거린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아폴론에 맞서 그것이 오리온인줄 모르고 화살을 쏘아 죽인다. 뒤늦게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달은 아르테미스는 오리온을 별자리에 앉히고, 자신이 갖고 있는 사냥개들 중 하나인 시리우스에게 하늘에서 오리온자리를 동반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아르테미스는 일생 단 한번 사랑한 사람을 자신의 경쟁적인 성격 때문에 희생자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엘 자이터, 오리온에게 다가가는 아르테미스, 1685년
그 후 아르테미스는 사랑을 포기한 여자처럼 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모든 남자를 경계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아르테미스는 모두 여성들과 요정들 사이에 있다. 아르테미스는 마치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와 그녀의 여자들처럼 레즈비어니즘(lesbianism: 여성동성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림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사냥감을 잡아온 뒤, 어여쁜 여자들과 발가벗고 목욕을 하고 있으며, 그 광경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다. 남자들은 언감생심 그녀 곁에 얼씬도 할 수도 없다. 마치 아마조네스의 여전사 같은 아르테미스! 그녀 곁에 있는 남자들이라고 해봐야 반인반수이자 호색한인 판과 사티로스들뿐이다. 이렇게 여성들과의 자연스런 연대의식을 가진 아르테미스, 그녀의 동성애적 성향 또한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물론 아르테미스가 동성애자였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지만, 화가들은 그녀를 마치 야생의 사포처럼 그려내고 있다. 예술은 하나의 해석이고, 예술가는 자유니까!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휴식중의 아르테미스, 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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