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심훈은 어머니께 보낸 ‘옥중 편지’에서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 쪼이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라고 적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회고록에서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 이가 으스러졌다”고 회상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개소 시점부터 광복 전까지 9만40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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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19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했고,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이 생기면서 명칭이 서대문감옥으로 바뀌었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름이 변경됐고, 광복 이후 서울형무소가 됐다. 1967년부터 20년간 미결수 전용 감옥인 서울구치소로 사용됐다.
◇민족대표·유관순도 수감…고문실에 경악
박 관장은 국내서는 드물게 감옥사를 전공했다. 2004년부터 서대문형무소에 근무하면서 사상범의 ‘수감기록카드’ 6000장을 세분화할 필요를 느꼈고, 그간의 연구 활동을 토대로 ‘식민지 근대감옥 서대문형무소’(2019)를 출간하기도 했다.
“6000장을 모아 통계를 내보면 나이대와 죄명, 지역 등을 포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1919년 12월 말 기준으로 서대문형무소에 3000여명이 수감됐다. 그 가운데 대다수는 3·1운동기에 잡혀온 사람들이고, 민족대표 33인도 그 안에 있었다. 유관순 열사도 공주감옥에 잡혀 있다가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됐다.”
통계로 보면 당시 수감된 사람들 중 20대가 55%로 가장 많았다. 수감자들 중 어린 사람들도 있었다. 박 관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끈 주역도 20대 대학생들이었다”며 “당시 수감기록카드를 보면 15~16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소녀들도 잡혀들어왔더라”고 안타까워했다.
“사실 지금 같으면 감방에 안가고 보호처분을 받을 텐데, 일제 치하에서는 어린 소녀들의 외침도 법률 처분을 받았다. 이들의 죄명은 대부분이 보안법, 사상법 위반이다. 사상범은 일본의 식민체제에 반하는 독립운동가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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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감옥은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위한 시설이었다. 교도소는 사회로 원활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교화하는 게 목적인데 일제 치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추워서 얼어죽는 일이 빈번했고 열악한 상황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독립운동가들을 사회와 단절시켜 식민지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 감옥을 활용했던 거다.”
지금은 코로나로 관람객이 많이 줄었지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연간 70만명이 방문하는 공간이었다. 지난해에는 방역을 위해 3월 1일 당일 입장인원을 제한했는데, 일찍부터 예약이 마감되기도 했다. 올해는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가상 공간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체험할 수 있는 ‘메타버스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감옥이라는 공간이지만 기념관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 만큼 너무 부담을 갖지말고 방문을 했으면 좋겠다.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곳을 둘러보며 무언가 하나라도 느끼고 간다면 우리가 운영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거다. 여기 수감됐던 사람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고통을 감내했는지 마음 속 깊이 생각해보고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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