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분야가 바로 연구·개발(R&D) 영역이다.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넘어 3D D램, CXL·PIM, 바이오 칩 등 AI 반도체 시대가 펼쳐질 상황에서 패권 경쟁의 결론은 R&D에서 판가름날 게 뻔하기 때문일 것이란 판단에서다. AI반도체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 엔비디아 직원들이 새벽 1~2시까지 일하는 건 물론이고, 주 7일 근무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일 터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류더인 전 회장이 “일할 준비가 안 돼 있는 사람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주요국 반도체 패권 기업이 R&D 분야에서만은 물러서지 않는 건 그 배경에 정부의 전폭적인 믿음과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어떤가. 정부·여당이 야심 차게 제정을 추진 중인 반도체 특별법에서 R&D 인력에 대한 주52시간 적용 제외 조항, 즉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소득 전문직 근로시간 규율 적용 제외)이 빠질 공산이 커졌다고 한다. 이 경우 주요국 반도체 패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 기업들로선 ‘기울어진 운동장’, 다시 말해 불리한 상황에서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정말 가관인 건 그 이유다. 거야(巨野)와 노동계 반발, 즉 표심(票心) 때문이라는 건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R&D에 시간제한을 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가뜩이나 주요국이 반도체 기업에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뿌리는 판에, 같은 이유로 이 조항마저 없앨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장기판에서 차 떼고, 포 떼고, 졸병으로만 이길 수 있겠는가. 트럼프 행정부는 ‘엔비디아-마이크론’으로 이어지는 원팀, 즉 ‘팀 아메리카’를 구상 중인데,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모양새다. 이러고도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는 건 망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