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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녀의 턱 부분을 보자. 턱을 돌리면서 드러나는 잔근육이 이렇게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움직임을 다른 방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찬사는 고스란히 그림으로 이어졌다. 아흔을 넘긴 노화가는 여전히 여인을 그린다. 거대한 화폭에 매달려 달랑 이름 하나뿐인 어느 여인의 입체를 평면으로 옮겨 놓는다. 그림은 영감을 자극하는 뮤즈를 품기도 하고, 광고영상에서 ‘필’ 받은 여인을 데려오기도 한다. 이렇게 완성한 ‘대형 초상회화’는 그이에게 기꺼이 ‘거장’의 타이틀을 하사했다. 알렉스 카츠(91) 얘기다.
사실 ‘초상’이라면 으레 가진 충분조건이란 게 있다. 작은 점조차 놓치지 않는 세밀한 묘사는 물론이고 파르르 흔들리는 세포의 미세한 떨림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영혼을 부르는 것이다. 얼굴의 한 부분이 됐든, 얌전히 포개 얹은 손가락이 됐든, 머리에 꽂은 꽃장식이 됐든, 의도치 않게 잡힌 옷주름이 됐든, 초상화 주인의 영혼을 대신할 최후의 한 점 혹은 한 획 말이다. 그렇게 결론은 ‘최대한 인물에 가깝게 가깝게’가 돼야 할 거다. 그 초상 앞에서라면 이런 칭찬이 최대치가 될 것이고. “진짜 실물과 똑같네!”
하지만 여기 그이의 여인들, 뭔가 불편하다. 이유는 하나다. 공식에 맞지 않는 서걱거리는 느낌이 들어서다. 무엇보다 인물을 클로즈업해서 잡아낸 형상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실물과 똑같네 다르네’를 따질 여지가 전혀 없다. 희로애락의 표정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요란스러운 치장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극 없는 단색의 대형배경에 툭툭 나열한 특색 없는 얼굴색. 최대의 장식이라면 여인의 입술에 덧칠한 붉은 립스틱 정도라고 할까.
이쯤 된다면 초상으로서 카츠의 그림은 말짱 ‘꽝’인 건가. 그런데 말이다. 이 여인들 아니 이 그림들, 묘한 중독성이 있다. 디테일을 죽인 대신 가져온 굵고 거친 선, 숨죽여 뻗어낸 간결한 색, 쓱쓱 그어낸 단순한 붓터치가 보는 이의 가슴을 두들기는 거다. 떠나는 발길을 붙잡아 기어이 뒤돌아보게 만드는 강렬한 잔상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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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롯데뮤지엄이 미국 뉴욕을 대표하는 현대초상회화작가 카츠의 대규모 개인전을 펼쳐놨다. 세계 미술계에서 열렬한 러브콜을 받는다는 그가 서울 한복판에 ‘모델&댄서: 아름다운 그대에게’란 테마로 꾸린 전시다. 올 초 개관한 롯데뮤지엄이 두 번째 기획전으로 준비했다.
△디테일 빼버린 단순한 구도로 인물 ‘극대화’
전시가 부각한 건 ‘카츠 스타일’이다. ‘세련된 그림이냐’ ‘대강 그린 거 아니냐’로 평가가 나뉠 법한 카츠의 초상은 ‘크롭-클로즈업’ 기법을 가져온 대담한 면짜기가 특징. 인물의 한 부분을 똑 따와 극대화시키는 구도로써 그의 모델들을 재탄생시킨 건데. 이를 가늠할 대표작이라면 역시 가로길이 2∼3m쯤은 우습게 넘기는 ‘거대한 초상회화’다.
전시에 나온 70여점은 미술사조의 어떤 지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카츠만의 ‘내 맘대로 사조’를 보여준다. 사실 1960년대 미국 뉴욕, 카츠가 미술계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당시의 트렌드라면 앤디 워홀의 팝아트, 잭슨 폴록의 색면추상 등을 앞세운 시각예술이 대세였던 때. 다시 말해 카츠의 예술세계는 팝아트에도, 색면추상에도 현혹되지 않은 독창적인 예술관이었다는 얘기다. 아쉬운 점이라면 예전의 ‘그 독창성’이란 걸 들여다볼 작품이 몇 점 나오지 않았다는 것. 최신작을 대거 들여와 전시를 꾸민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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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그 흠이 아니라면 시선을 뺏길 만한 요소는 곳곳에 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도입부에 집중배치한 ‘빨간 바탕의 여인’과 ‘검은 바탕의 여인’이다. 카츠가 지난해에 집중적으로 작업한 ‘코카콜라걸 시리즈’(2017·2018)와 ‘CK(캘빈클라인) 시리즈’(2017). 우연히 TV광고를 보고 착안했다는 이들은 ‘대놓고 상업적이지만 그다지 상업적이지 않은 작품’이다. CK 모델들은 브랜드명을 속옷 위에 노출시켰다지만 카츠 특유의 무색무취에 가려 있고, 코카콜라 모델들에선 브랜드를 연상시킬 붉은색 배경, 흰색 무용복 외엔 별로 내세울 게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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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들 시리즈를 두고 굳이 상업성을 왈가불가할 만큼 눈이 한가하지도 않은데. 한 화폭에 장면 장면을 연결한 구성에 마음을 뺏겨서다. 영상으로 촬영한 장면을 끊어 각각의 컷으로 연결한 듯하다면 이해가 쉬울까. 한 캔버스에 여러 얼굴을 박아두기도 하고, 옆모습·뒷모습·앞모습을 나란히 배치해 마치 시간순으로 포착한 듯도 하니. 미술관이 ‘세계 최초 공개’란 수식을 놓치지 않을 만큼 독특한 요소가 돋보이는 거다.
△뮤즈를 향한 마음…아내 초상 250여점 그려
그럼에도 카츠의 오랜 주제라 할 ‘백미’는 따로 있다. 그의 여인 중 으뜸이라 할 아내 ‘아다 카츠’(90)의 초상. 60여년간 이어온 ‘아다 시리즈’는 250여점에 달한단다. 아내가 실질적인 ‘뮤즈’임을 감추지 않은 작업이었던 거다. 그의 말대로 “20세기에 가장 많이 그려진 여인”이라고 할까. 그중 244×305㎝의 ‘아다’(2012)는 옆얼굴과 뒷모습을 매치한 역작으로 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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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외에 ‘카츠 스타일’을 띠는 경향성은 ‘컷아웃’이란 평면조각에서 정점을 찍는다. 입체간판처럼 평면의 금속판에 그림을 그린 뒤 윤곽을 따라 잘라낸 조각 말이다. 자칫 밋밋할 뻔한 전시장에 활기를 돋우는 ‘콜먼연못’(1975), ‘기회’(2016), ‘블랙드레스’(2018) 등이 나섰다.
결국 카츠를 카츠답게 만드는 건 ‘뉴욕’이다. ‘뉴욕사람들을 브랜드화’했다는 평가가 과하지 않을 만큼 그의 작품은 지극히 미국적이다. 조명 한 줄기 내린 반사광에 의지해 뽑아낸 초상의 향연. 깊이 따위는 내다버린 듯, 감각적이나 참으로 무심하고 단조로우나 지극히 대범한 붓선 말이다.
그만큼 한국의 서울에서라면 이질적일 수도 있을 텐데. 기우였나. 전시포스터 하나로 분위기를 바꾸고 있으니. 아마 장소 덕을 본 듯하다. 거대 쇼핑몰 중간에 자리잡은 미술관을 단장하는 데 카츠의 작품은 제법 잘 어울린다. 그것도 무심함과 대범함으로 무장한 그의 여인들을 내세웠으니. 전시는 7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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