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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관장은 논문에서 임청각이 보물로 지정된 시기를 근거로 설명한다. 그는 “1963년은 해방 후 독자적인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이에 의거해 보물로 재지정된 시점”이라고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1933년 우리나라 보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이유로 조선의 문화재 가운에 보존 가치가 높은 유물들을 문화재로 지정한다. 오랫동안 국보 1호 자격 논란이 있었던 숭례문이 보물 1호로 지정된 것도 이때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419건의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했다.
해방 이후 격동기를 거치면서 미처 문화재 관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여 방치됐다가, 1955년 일제가 지정한 일련 번호는 그대로 둔 채 일괄 국보로 승격시켰다. 이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재정 된 후 이들의 일련번호를 국보와 보물로 정비했다. 즉, 임청각도 일제가 보물로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지정 과정에서 보물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박 관장은 임청각에 대한 독립운동 측면으로의 관심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이상룡의 유해가 봉환됐던 1990년에 이르러서야 주목됐다고 말한다. 당시 이상룡의 후손들과 국가 보훈처 광복회에 의해 이상룡을 비롯해 일가 3명 등 독립유공자 4명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왔다. 임시정부 대통령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된 첫 사례로 이상룡의 독립운동 업적과 함께 임청각도 재주목받게 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1971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경주 최부자 댁에서도 보인다. 경주 최씨 후손인 독립운동가 최준(崔浚)과 관련 있는 고택이다. 지정 시기를 고려할 때 독립운동보다는 조선 중기 주택 건축으로서의 측면에 가치를 뒀던 것이다. 최준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시점이 국가민속문화재지정 후 10여 년이 지난 1983년이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박 관장에 따르면 항일 독립운동 관련 유적 유물, 건축 공간에 대한 문화재로서의 지정은 1972년의 시점부터이다. 1972년 윤봉길, 안중근,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 관련 유품과 유묵, 생가지 등이 각각 보물과 사적으로 지정됐다. 또 문화재 지정 상한 연도도 1910년에서 1945년으로 확대된다.
인식의 변화에도 박 관장은 여전히 항일·독립운동 관련 유물의 문화재 지정은 타 분야에 비해 제한적이라고도 지적한다. 실제 2018년 기준.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3664개 호 가운데 항일 독립운동 문화재는 93개 호로 전체 대비 2.54% 수준이다. 박 관장은 “고고미술이나 고건축, 고분군 등 상당한 시간의 경과와 경험의 축적이 주류를 이루었던 문화재 지정 경향에 따라 근대 이전의 것들에 비해 이후의 것들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부여받는데 한계가 있었다”며 “역사학계와 문화재 관련 학계, 기관 또는 단체와의 공조를 통한 관련 유물의 발굴과 문화재 지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