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경은 기자] 전 세계 재생 페트(recycled-PET) 수지 1위 생산업체이자 두자릿수의 고성장을 구가했던 ‘인도라마 벤처스(IVL)’마저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에 나섰다. 고금리·인플레이션·인력확보 등 거시경제환경이 비우호적인 탓에 미국 텍사스의 페트 중간원료인 테레프탈산(PTA) 생산 공장 건설 투자를 중단했다. 그럼에도, 재생 페트 생산 재활용 시설 투자만큼은 확대 기조를 이어갔다. 금맥으로 떠오른 폐플라스틱이 석유화학산업 불황의 돌파구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재생 페트는 신재(Virgine·버진 원료)보다 30%가량 비싸지만 공급은 부족하다.
반면 국내 석화사들은 미래 먹거리인 ‘화학적 재활용’ 시설 투자를 늦추고 있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 투자로 재무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탓이다. 한국은 대기업의 재활용 업종 진출이 막히며 재생원료 시장 진입에 애를 먹고 있다. 폐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이 국내 업체 간 ‘밥그릇 싸움’이 아닌 혁신 산업으로 성장해 글로벌 진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단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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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이데일리 취재를 종합하면 1월 현재 국내 한 재활용 업체가 판매하고 있는 재생 페트 원료인 r-PET 칩(chip) 가격은 kg당 1800~1900원으로 신재(1350원) 대비 30~40% 웃도는 것으로 파악된다. 공식 통계를 집계하지 않아 업체나 시기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r-PET 재료는 신재의 20%를 웃도는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이 업계의 전언이다.
r-PET 칩은 비정형의 플레이크를 가공해 작은 알갱이 모양으로 정형화한 것으로 최종 플라스틱 제품 투입 전단계의 원재료다. 신재보다 비싸지만 공급이 부족해 수개월 이상 구매 대기를 해야 할 정도다.
보스턴 컨설팅(BCG)에 따르면 2050년까지 폴리에틸렌(PE,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합성수지의 한 종류) 시장의 성장성은 연간 0%, 물리적 재활용은 6.4%, 화학적 재활용은 9%로 추정된다. 화학적 재활용이 물리적 재활용에 비해 순도와 성장성 면에서는 보다 나은 기술로 꼽히지만 문제는 아직 상업생산이 이뤄지기 전인 실증단계에 그친다.
국내 기업이 화학적 재활용 시설 투자에 나서는 사이 태국에 본사를 둔 인도라마 벤처스는 물리적 재활용 기술을 중심으로 재활용 시장(secondary market)을 석권하고 있다. 2011년 페트 재활용 사업에 처음 진출하며 연간 3576t에 그쳤던 생산량은 2021년 2분기 33만t, 2022년 69만t으로 급격히 늘었다. 미국, 체코,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주요 재활용 업체 인수합병(M&A)과 합작법인(JV) 설립을 통해서다. 35개국에 진출, 147곳의 재활용 생산시설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한해 PET가 재생원료로 사용되는 양(2~3만t)의 20~30배에 달하는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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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재생 원료 사용 규제가 점차 강화되며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재생원료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연합(EU)은 2030년까지 모든 플라스틱에 재생원료 비중을 최소 30% 의무화했다. 주요 글로벌 기업들이 내건 공약 수준은 이보다 더 높다. 코카콜라는 2030년 50%, 로레알은 2025년까지 50%다. 유니레버, 바이어스도르프는 2025년 25%를 내걸었다. 이미 독일 세제 브랜드 프로쉬(Frosch)의 제조기업인 ‘베르너 앤 메르츠(Werner & Mertz)’는 2015년부터 모든 포장용기에 100% 재활용 플라스틱만 사용하고 있다.
이에 신재 생산공장 투자는 중단한 인도라마 벤처스는 지난해 3분기 브라질 생산량을 3배 늘리는데 이어 2025년까지 총 75만t까지 생산시설을 확대하고, 15억달러(2조원)를 투자한단 계획이다.
이 회사가 코카콜라, 펩시코, 유니레버, P&G 등 주요 글로벌 플라스틱 사용 기업들과 r-PET 공급 협력을 통해 각 지역에서 왕성한 재활용 업체를 인수하는 동안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플라스틱 물리적 재활용은 기술 수준이 낮은 중소기업이나 하는 사업 정도로 치부하며 뒤늦게 진입하려다 빗장이 걸렸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위기는 면했으나,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중소기업과 상생협약을 통해 안정적 원재료 공급에 협조하는 대신 대기업은 재활용업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면서다.
국내 대기업들이 조단위 투자를 하고 있는 ‘화학적 재활용’은 일러야 2025년께 상업생산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늦어질 전망이다. 롯데케미칼은 2024년 열분해 시설 준공 목표에서 투자를 일시 중단하며 2026년으로 미뤘고, SK지오센트릭도 울산공장 시설 투자 시나리오를 면밀히 들여다 보기로 했다. 전세계 경기침체, 화한사업 불황 지속, 고금리 등 경영 불확실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 석유화학사 관계자는 “국내 폐기물 시장에서는 원재 확보가 쉽지 않다. 대기업의 자본으로 기존 재활용업 진출을 통해 고순도 원재료 확보가 뒷받침 돼야 한다”며 “예상을 뛰어넘는 불황의 장기화에 고금리까지 겹치면서 경영진 교체시기와 맞물려 미래 먹거리에 대한 과감한 투자 집행은 재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