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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발랄한 휘몰이라고 할까. 불같은 소용돌이를 머리에 올린 ‘걸’(2018)이나 거세게 용솟음치는 바다를 입은 ‘모델’(2016)이나. 말은 없지만 여인들이 내는 소리는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겐 꿈이 있다고 욕망도 있다고, 세상을 향해 보란 듯이 솟아오를 거라고. 그 끝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 묵묵히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읽히니 말이다. 이는 곧 작가 이혁진(51)의 이야기일 거다. 납작한 그림으론 만족하지 못해 캔버스에 조각을 올린 ‘그림조각’으로 ‘감정의 자화상’을 빚고, 결국에는 그 형상을 빼내 ‘꿈의 자조상’까지 세우며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하지 않았나.
#2. 이곳은 다른 세상인 듯하다. 긴 그림자를 앞세워 더딘 발걸음을 내딛는 저 ‘노인’을 보고 있자니 말이다. 뒷짐 진 구부정한 허리와 축 늘어진 어깨는 세월 그 자체다. 노인에겐 꿈도 욕망도 이미 다 지나버린 ‘일장춘몽’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안 보인다고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겠는가. 인생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는 법. 누구에겐 남루하게 보일 뿐인 저 풍경 ‘길을 걷다’(2017)가 누구에겐 첩첩이 쌓인 삶의 클라이맥스처럼 보일 수 있다. 작가 박순철(58)은 그 무거운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안다. ‘종이에 수묵담채’란 올곧은 재료와 기법으로 한평생 우직하게 붓 가는 길을 내주고 있는 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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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작가 26명의 다른 개성이 만든 ‘조화’
과연 어울릴 수 있는 조화인가. 여인과 노인, 알록달록한 컬러와 흙보다 깊은 먹. 그런데 이 둘만이 아니다. 저들 사이엔 붉은 향 뚝뚝 떨구는 장미 한 송이를 거대한 화면에 클로즈업한 ‘사이’(2017·박훈성)가 중심을 잡고 있고, 수저와 도깨비방망이를 콜래보한 위풍당당한 ‘꿈수저’(2020·김성복)가 입구를 지키고 섰다. 서양과 한국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버터플라이 블루’(2007·클로드 아바)를 지나면, 살포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돌부처 같은 ‘소녀M’(2020·정봉기)의 수줍음에도 취할 수 있다.
이들뿐인가. 어디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중견급 미술가가 대거 모였다. 권희연, 김성복, 김지현, 나형민, 박성수, 박훈성, 송현화, 신현국, 이동재, 이사라, 이종진, 장은경, 장지원, 정봉기 등 국내작가 19명, 알랭 본느푸, 더그 스트래트포드, 존 뉴먼, 캐리 킴, 조르지오 스칼코, 퍼터 코로스테렐레프 등 해외작가 7명 등 총 2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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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강렬한 개성의 색채·형상이지만, 기꺼이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한다. “예술은 그냥 삶이다, 삶이 자주 예술인 것처럼.” 이 단순하고 선명한 주제를 확인케 하는 여기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설회관에 최근 문을 연 대경뮤지엄. ‘21세기 예술지성: 삶과 예술의 찬란한 만남’이란 타이틀로 개관전을 펼치고 있다. 작가마다 회화·조각작품 한두 점씩 걸고 세워 총 51점을 선보이는 자리로 마련했다.
벽을 치고 문을 단 가둔 공간이 아닌 오다가다 들를 수 있는 ‘건물 로비’를 활용했다. 덕분에 문턱이 한껏 낮아진 전시장이 됐다. 대경뮤지엄 관계자는 “장소의 성격상 상주하는 관계자들과 수시로 방문하는 외부인들이 고정 관람객이 될 수 있다”며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미술로 충전할 수 있는 예술 쉼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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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로 활약하는 김윤섭 아이프미술경영연구소 대표가 전시의 윤곽을 잡았다. 취지에 걸맞게 익히 잘 알려진 작가들의 편안한 작품을 선정해 부담감을 덜어냈다. 테마는 ‘자연과 생명’ ‘인간과 희망’. 경외감이 절로 생기는 산과 물을 옮겨낸 ‘풍경’은 물론, 사는 일의 의지를 붓과 정에 실어낸 ‘인물’, 독특한 기법과 양식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꿈·소망’이 다채롭다.
◇유명 부부작가 두 커플의 ‘작품 행진’
전시에는 부부작가 두 커플이 등장해 또 다른 얘깃거리를 만든다. 구자승(80)·장지원(75) 부부화백과 권치규(55)·김경민(50) 부부조각가가 그들이다.
극사실주의 표현으로 한국 구상미술의 대가로 꼽히는 구 화백은 나무상자에 와인병과 꽃병, 카메라와 주전자 등을 올리고 조명빛까지 잡아낸 ‘정물’(2020), 도자항아리에 만개한 꽃을 가득 꽂아둔 ‘꽃’(2020)을 내놨다. 나무와 풀, 새와 집을 소재로 ‘정감있는 몽환’을 오돌토돌한 화면에 실어내는 장 화백은 연작 ‘숨겨진 차원’ 중 두 점(2014·2017)을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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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에 이미 소문난 커플인 권치규·김경민 작가는 세 점을 꺼냈다. 추상인 듯 구상인 듯 물체에 어린 그림자까지 심어내는 권 작가는 스테인리스스틸에 우레탄도장을 입혀 물가에 늘어진 버드나무에 서정성을 채운 ‘바이오-레질리언스’(2020), 역시 같은 소재로 푸른 나뭇가지가 잡아둔 달빛을 뽑아낸 ‘만월’(2017)을 내보인다. 국내서 가장 대중적인 조각가라 할 김 작가는 예의 ‘생활인 작품’을 한 점 세웠다. 날렵하게 차려입은 한 직장인의 연두색 재킷과 싱그러운 미소가 주위를 환히 밝히는 ‘굿모닝’(2020)이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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