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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밤 부둣가. 바닷바람 막아선 한 다방에서 삐져나온 백열등 불빛이 젖은 길가에 번지고 있다. 나지막한 동네 지붕들과 어울린 등대·가로등은 그 위에 운치를 더하는 중이고.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어부, 다방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주민. 다들 오늘 하루 안녕했을까.
내려앉은 하늘, 높은 파도까지 순하기만 한 그림은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작가 설종보(55)의 작품이다. 작가는 소시민의 사는 일을 화면에 소담하게 풀어놓는다. 꽃 피고, 눈 내리고, 달 떠오른 전경을 그 속에 엉켜 사는 이들의 일상에 섞어 푸근하게 담아내는 작업이다. 그 따뜻한 장면들을 찾기 위해 작가는, 고향인 부산은 물론이고 강릉·인제·제주·진해·서산 등 전국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는데.
정겨운 풍경이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건 아니었단다. 한때는 도시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그리기도 했다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차가운 우울보다 따스한 희망을 그려내자고 마음을 바꿨단다. 멀리 돌고 돌아 ‘비 오는 날 선창다방’(2019)에까지 왔다는 얘기다. 덕분에 선명한 색채감을 도톰한 면과 뭉툭한 선에 묻힌, 사람 사는 냄새 풍풍 풍기는 옛 추억을 나눌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그 추억이 장밋빛뿐이겠나. 이젠 ‘청춘의 미련’보다 진한 ‘낭만에 대하여’로 위로를 삼을밖에.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25일까지 부산 수영구 광남로172번지길 미광화랑서 여는 개인전 ‘시간의 정경’에서 볼 수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 34×45㎝. 작가 소장. 미광화랑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