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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교수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불신의 문화 깨야”

박보희 기자I 2013.05.31 06:32:03
지난 15일 마포구 서강대에서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석좌교수는 ‘소수자적 감성’을 강조했다. (사진= 이데일리 한대욱 기자)
[이데일리 박보희 기자] 대학을 취업학원이 아닌 학문의 전당으로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정한 ‘대학인’(大學人)들이 있다. 명강의로, 학문적 성취로 존경받는 교수들을 찾아 그들의 가르침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모든 문제가 사회의 신뢰도와 연결되는 것 같아요. 엘리트들끼리 연줄을 쌓아서 모든 것을 독식한다는 의심이 있고, 실제 그런 부분들이 있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까지도 의심이 드는 건 결국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낮기 때문일 거에요. 그런 사회적 불신을 깨야 해요. 이 책도 결국 우리 사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겠죠.”

‘김영란’이라는 이름이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을 연내에 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다. ‘김영란법’은 공직자가 직무관련성과 상관없이 100만원이 넘는 금품을 받으면 처벌하도록 하는 법안이다.

이에 발맞춰 권익위원장 시절 이 법안을 추진한 김영란(57)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대담집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한 고민’을 주제로 대중에게 말을 건넸다.

김 교수의 삶은 1978년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순간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의 결혼은 첫 검사와 판사 부부 탄생으로, 2004년에는 첫 여성 대법관 임명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30여년 몸담았던 법관에서 물러날 때는 관행처럼 이어지던 로펌 행을 마다하며 또다시 화제가 됐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다던 그녀를 세상은 다시 권익위원장으로 불러냈고, 그녀는 ‘김영란법’으로 다시 한 번 조용한 파장을 일으켰다. 교수로 새 삶을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그녀는 당연하다고 말하는 선택들을 세상은 남다르다고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적이면서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담이라는 형식을 택했어요.”

책 얘기를 꺼내자 김 교수는 정치자금 문제로 말문을 열었다.

“책에서 정치자금 부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더군요. 저는 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현실 정치 부분에는 부족한 점이 많겠죠. 제가 어떤 제도를 제안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다만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잔뜩 던져놨어요. 어떻게 해결해나갈지는 함께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김 교수의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는 지난 12월 대선에 출마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누구보다 현실 정치의 한계를 체감했을 터다.

“모든 것이 양 당의 주자 중심으로 가더군요. 새로 출발하는 제삼자가 새로운 정책을 내도 사람들에게 전달할 길이 막혀있어요. 결국 정책과 무관한 이미지로 후보를 찍게 되는데, 사람들이 정책 선거 마인드를 갖기 힘든 구조가 아닌가 싶어요.”

그동안 김 교수가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화려한 이력보다 사회적으로 예민한 사안에서 보여준 남다른 선택들 때문이다. 그녀는 대법관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로 학교 내 학생의 종교의 자유 인정 판결을 꼽았다.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지난 15일 서강대 연구실에서 법조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다른사람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사진=이데일리 한대욱 기자)
“믿지 않는 종교의 학교에 배정을 받은 학생, 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학교 사이에서 종교의 자유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결이었어요. 대법원이 본연의 역할을 한 판결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

그녀의 판결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 신장을 위한 사회 시스템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무엇보다 ‘소수자적 감성’을 강조했다.

“소수자를 지켜야 하는 것은 배려의 차원을 넘어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다수자들만 있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가 어렵죠. 소수자들이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공급원이 될 수 있어요. 다수의 사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데 귀중히 모셔야 하는 존재들인 거예요. 또 어떤 면에선 다수인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소수자이기도 하죠. 나의 소수자적 관점을 보호하려면 남들도 보호해줘야 해요. 서로 함께 살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문제인거에요.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해요.”

70년대 판사의 자리에 오른 그녀 역시 소수자였다. 절대 다수가 남성인 법조계에서 판사이자 아내, 며느리, 엄마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여전히 남성적 문화 속에서 무거운 삶을 헤쳐 나가고 있는 후배 여성들에게 그녀는 현실 속에서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저 자신도 모든 일이 힘들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살아낸 사람이에요. 우선은 개인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당장 눈앞에 힘든 것에 급급해서 흐름을 놓치면 나중에 큰 차이가 나요. 문화는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거예요. 갑자기 바뀌는 게 아니죠. 제 책도 문화를 바꾸기 위한 책이거든요. 지금도 많이 바뀌었잖아요. 또 어느새 바뀌어 있을 거예요.”

법관으로서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녀의 어릴 적 꿈은 사실 문학평론가였다. 직접 소설을 써 교지에 실리기도 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법관의 길을 걷게 됐지만,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아쉽긴 했죠. 제가 판사가 되던 때는 여성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았어요. 그때는 부모님의 권유로 하게 된 일이었지만 해보니 나름대로 재미있었어요. 결국 지금까지 오게 됐죠. 지금 보니 아버지가 절 꿰뚫어 보신 것 같아요(웃음).”

문학인을 꿈꾸던 김 교수가 최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초대 헌법재판관인 알비 삭스의 ‘블루 드레스’. 어쩔 수 없이 법관의 길을 걸었다는 그녀지만 여전히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고민의 깊이를 더 해 나가고 있었다.

후배 법조인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법률가가 권력을 가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자리라 추구하는 건 낡은 생각이에요. 어떤 직업이든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 없이는 우리 사회의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없어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에 다한 이해가 중요해요. 감정적 이해도 필요하지만 입장의 이해가 필요하죠. 타인은 적이 아니고 자기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연장해 나가세요.”

판사가 아닌 교수로 학생들을 만난 지 석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강의 준비하면서 전에 했던 판결들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거리를 두고 보게 됐어요. 그게 참 재미있네요. 공부가 많이 돼요.”

마침 스승의 날이었던 인터뷰 날, 학생 두 명이 들어와 카네이션을 건넸다. 카네이션을 받아든 김 교수는 “교수가 되니 또 이런 재미가 있네요”라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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