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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불현듯 떠올랐나. 아니 작정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별짓을 하진 않았다는 것. 그저 상점에서 산 남성용 소변기에 서명 하나만 남겼을 뿐이다. ‘알 뮤트(R. Mutt) 1917’이라고. 물론 작품명 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샘’(Fontaine)이라 붙였다. 이쯤 되면 더 궁금한 건 ‘샘’을 바라본 시선이다. 예상할 만한 거센 비평을 몰고 왔다. “이게 무슨 예술이야?” 당장 출품을 예정했던, 1917년 미국독립예술가협회가 연 ‘앵데팡당’ 전에서 쫓겨나는 변을 당한다. 6달러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 구석자리 하나 못 얻은 거다.
그럴 만도 했다. 작가가 한 일이라곤 소변기를 사서 서명하고 전시회에 들고 간 것밖에 없으니. 게다가 ‘알 뮤트’는 욕실용품 제조업자의 이름이다. 100년 전 혁명적인 프랑스미술가가 미국 뉴욕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 주인공은 마르셀 뒤샹(1887∼1968)이다.
뒤샹의 치기어린 작품은 ‘샘’이 처음은 아니었다. 와인병 건조대를 작품으로 둔갑시킨 ‘병 건조대’(1914), 눈 치울 때나 쓰는 커다란 삽을 내놓은 ‘부러진 팔 앞에서’(1915) 등. 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할 이 행위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된 ‘레디메이드’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기성품이란 뜻이다. 결국 ‘샘’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품”으로 우뚝 서기까지 했는데. 물론 한참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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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이 한국에 온다. ‘샘’을 데리고 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에 펼칠 ‘마르셀 뒤샹’ 전(12월∼내년 4월)이다. 이번에 오는 ‘샘’은 1950년에 재현해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이다. 1917년 원작은 사진만 남아 있다. 뒤샹의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1912)도 출격대기 중. 나체의 여성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을 연속 노출사진처럼 그려 그의 ‘악명’을 한껏 끌어올린 작품이다.
△이성자·윤형근·김중업·파로키 등 거장 줄 세워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라인업이 화려하다. 110여점을 들여 국내 역대 최대 규모로 꾸릴 ‘마르셀 뒤샹’ 전을 준비하는 동안 탄생 100주년을 맞은 화가 이성자(1918∼2009)의 150여점을 내놓는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3∼7월 과천관)이 포문을 연다. 이어 46세에 요절한 현대미술가 박이소(1957∼2004)의 드로잉·아카이브 200여점을 선보이는 ‘기록과 기억’(7∼12월 과천관), 한국보단 세계서 더 알려진 1세대 단색화가 윤형근(1928∼2007)의 미공개 60여점을 꺼낸 ‘윤형근’ 전(8∼12월 서울관), 한국건축에 모더니티를 도입한 1세대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의 200여점을 모은 ‘김중업’ 전(8∼12월 과천관) 등 국내 거장이 줄줄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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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레바논 사진작가 아크람 자타리(52)의 사진·영상 30여점을 옮겨온 ‘아크람 자타리’ 전(5∼8월 서울관), 독일 영화감독이자 미디어아티스트인 하룬 파로키(1944∼2014)의 필름·비디오 120여편으로 꾸민 ‘하룬 파로키’ 전(11월∼내년 3월 서울관) 등 대형작가의 면면으로 꽉꽉 채웠다. 이뿐인가. 이중섭·박수근·김환기·백남준·오지호·안중식·이불·노순택 등 소장품을 대거 꺼내놓는 ‘근현대소장품’(5월∼내년 3월 과천관)과 ‘소장품특별전: 균열 2’(9월∼내년 9월 과천관)까지. 서울관·과천관·덕수궁관이 한치의 틈도 없이 돌아갈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라인업을 주목하는 건 국내 미술계에 미칠 영향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게다가 ‘국립’이 들이대는 역량은 사립미술관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견줄 만한 사립이 있다면 삼성미술관 리움 정도일까. 하지만 리움은 현재 ‘개점휴업’ 상태. 게다가 올해는 특별한 변수가 붙었다. 3년 임기의 마지막 해에 접어든 바르토메우 마리(52)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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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관장 ‘승부수’ 먹힐지 관건
“국립미술관에 외국인 수장이 말이 되나. 한국정서를 그가 어찌 이해할 건데.” “축구도 외국인 감독이 하는데 못할 건 뭐냐. 적어도 학연·지연 등에 매이진 않을 거다.”
극렬한 찬반논란을 끼고 2015년 12월 시작한 3년 임기였다. 오랜 공석을 깬 데다 첫 공공기관 외국인 수장으로 부임했으니 임용 자체만으로 파장이고 소란이었다. 그후로 2년. 특급논란은 잠재웠다지만 성과를 두곤 끊임없이 말이 나왔다.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해외미술계와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유럽현대미술과의 가교가 되겠다” 등 취임 일성을 제대로 지켰느냐는 거다. 사실 ‘해외진출’은 국내 미술계가 안은 숙제이자 과업이다. 스페인 출신으로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마리 관장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더도 덜도 말고 바로 이거였다. 다른 하나는 지난 2년간 마리 관장의 색깔이 제대로 드러났느냐는 것. 다시 말해 누가 관장을 해도 할 만한 전시였다는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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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의식했는지 올해 라인업에는 분위기 반전을 위한 노력이 역력하다. 마리 관장이 직접 큐레이터로 나선 해외투어 주제전 ‘문명: 우리가 사는 방법’(10월∼내년 1월 과천관)이 대표적. 작가 100여명의 200여점을 거는 국제사진전이다. 아시아미술의 허브가 될 중장기프로젝트를 가동하겠단 의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2018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3∼12월 서울관), ‘2018 아시아기획전: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4∼7월 서울관), ‘문화변동과 아시아 현대미술 1960∼1990년대’(내년 1∼5월 과천관) 등 아시아 동시대미술을 주도하겠다는 ‘야심’이 줄을 이었다.
마리 관장은 “임기를 연장하고 싶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 올해 라인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그는 “미술관의 3년은 너무 짧다. 장기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입장과 미술관의 상황을 에둘렀다. “결국 전시는 학예팀이 만드는 거고 마지막 결정만 관장 몫”이라고 덧붙였으며, “미술관은 장기전략으로 가는 게 맞다. 연임해서 두 번째 발걸음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로 마지막 못질까지 충실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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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리 관장이 엄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10년 이상씩 장기프로젝트를 체질화한 해외미술계를 곁눈질해볼 때 임기 3년을 주고 성과를 내란 요구는 ‘생떼’에 가깝다. 국내 미술계가 처한 한계와 구태를 마리 관장에게 덮어씌우는 꼴이라고 할까. 3년도 못 참으며 미래지향 운운하는 것도 어이가 없다.
어찌 됐든 마리 관장은 올해 라인업으로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국립’이란 물적·인적자원을 총동원한, 지나치게 복잡하고 과도한 의욕으로도 보인다. 과연 100년 전 ‘소변기와 서명’이란 혁명을 볼 수는 있을지. 뒤샹의 ‘샘’을 들여오는 카드가 먹혀 국내 미술계의 대반전을 이룰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