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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미국 거래소들의 흥망성쇠

이정훈 기자I 2013.08.28 06:02:02
[뉴욕= 이데일리 이정훈 특파원] 전세계 돈과 정보, 시장 플레이어들이 모여있는 미국 월스트리트는 말 그대로 세계 금융의 중심지다. 그 엄청난 상징성이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명소 역할까지 하게 만들 정도다.

그런 월가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든 일이 지난주에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증권거래소 가운데 하나인 나스닥시장이 3시간씩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느 거래소든지 간간이 시스템 오류를 경험하곤 하지만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미국 증시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시장 문을 닫아버린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특히 지난해 5월 페이스북이 기업공개(IPO)에 나섰을 때에도 한꺼번에 몰려든 매매주문으로 시스템이 30분 가량 지연되거나 중단됐던 나스닥OMX그룹은 이번에도 30분만에 문제가 된 호가배분시스템을 고쳤으면서도 매매 재개를 결정하는데 2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이같은 관리 부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놀랍게도 미국 거래소의 치명적 시스템 오류는 의외로 흔한 일이다. 미국 최대 거래소라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조차 지난해 8월 시장 조성(마켓 메이킹) 담당기관인 나이트캐피털그룹의 트레이딩 시스템 오류로 150여개 종목 주가가 급등락하는 일을 초래했다. 또한 넉 달 뒤인 12월에도 호가시스템 오류로 200여개 종목의 거래를 중단한 바 있다.

세계 금융의 1번지인 월가에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시스템 오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급변하고 있는 전세계적인 거래소 산업 환경 변화와 관련이 있다.

민간기관이 운영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거래소들은 주요 투자은행들이 주주로 있는 대체거래시스템(ATS)인 BATS 글로벌마켓이나 다이렉트엣지 홀딩스 등에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 급기야 3~4위 거래소 BATS와 다이렉트엣지는 합병을 선언하며 나스닥을 제치고 2위 거래소로 등극해 NYSE와 한판 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기존 거래소들은 ATS에게까지 호가와 주문 등을 배분해야 하는 부담이 늘어나지만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시스템 개발과 유지보수에 투자할 몫은 줄어드는 악순환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주말 나스닥시장의 오류도 NYSE와 ATS들에게 호가를 배분하는 시스템상 문제였다.

결국 궁지에 내몰린 거래소들은 인수합병을 통한 덩치 키우기로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독일의 도이체뵈르제는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와 한 몸이 됐고 얼마전 월가를 대표하는 거래소 NYSE는 인터컨티넨털익스체인지(ICE)에 매각을 결정하는 등 글로벌 주요 거래소간 합종연횡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글로벌 거래소 산업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독점 거래소인 한국거래소(KRX)는 답답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공공기관 지정을 통해 여전히 정부 관리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정권 교체 이후 이사장 선임은 몇 개월째 감감 무소식이다. 수 년째 말만 무성한 민영화 논의는 거의 진전이 없다. 금융당국도 이제서야 KRX의 독점구조를 깨기 위한 ATS 설립방안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잇단 거래소 시스템 오류와 잘 나가던 기존 거래소들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한 나라의 금융시스템 근간을 이루는 증권거래소라는 인프라의 안정적 유지와 거래소 산업의 경쟁체제 구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인지 새삼 절감한다.

거래소의 민영화와 경쟁구도 구축과 같은 정책의 대원칙은 신속하게 결정하되 다른 한편에서는 KRX와 ATS가 공존할 수 있는 전략과 증권거래 인프라를 보다 안정화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병행하는 이른바 ‘투 트랙(two track)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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