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모든 건 변한다’(Everything Changes). 몰랐던 일도 아니고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입 밖으로 내면 단순치 않다. 게다가 이 비장한 선언이 저서 첫 장에 떡하니 친필사인과 함께 찍혀 있다면. 미세먼지로 지구환경이 심각하다는 징후도 아니고 의학의 발달로 암이 잡힐 거란 신호도 아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변화’란 건 인류가 종을 바꿀 때가 다가왔다는 폭탄선언이다. 지난 수만 년간 인간을 지탱해온 호모 사피엔스가 이제 운명을 다했다는 충격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2014년 세계는 한 권의 책으로 요동을 쳤다(한국어판은 2015년에 출간했다). 당시 30대 후반이던 유발 하라리(41) 예루살렘히브리대 역사학 교수가 낸 ‘사피엔스’였다. 주제는 간단했다. ‘과학기술이 미래를 지배할 것.’ 그런데 이 간단명제가 ‘인공지능’을 얼굴마담으로 한 ‘4차 산업혁명’ 논쟁에 불을 놓는 계기가 됐다.
전작 ‘사피엔스’가 7만 년의 역사를 살아낸 인간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건가를 물었다면 ‘호모 데우스’는 인간으로서의 소명을 다한 ‘신이 된 인간’은 이제 어디로 갈 건가를 내다본다. ‘사피엔스’의 말미에 “우리 후대는 신과 비슷한 존재일 듯”이라며 슬쩍 흘린 단서에 물증을 잔뜩 매달아 ‘신이 된 인간’을 밀어붙인 형국이다. 지구를 평정하고 신에 도전하는 인간은 어떤 운명을 만들지, 진화를 거듭할지 영 쓸모없는 존재가 될지, 그 미래는 유토피아가 될지 혹은 디스토피아 될지. 하라리는 620쪽 빼곡히 쉴 새 없이 논쟁거리를 쏟아낸다. 그러다가 결론은? ‘호모 사피엔스의 끝장’이다. 신이 되려면 어쩌겠는가. 인간을 죽이는 수밖에.
▲불멸의 인간이 뭘 할 수 있나
‘신이 된 인간’인 호모 데우스가 출현한 의미는 이렇다. 인류를 지겹게 괴롭히던 기아·역병·전쟁을 진압하고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빠져나온 그들이 종국엔 자신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한다. 그러곤 영원히 죽지 않은 불멸을 통해 마침내 신성을 얻어내는 드라마틱한 결말을 본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단다.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비유기체 합성. 이 복선을 깔아두고 하라리는 바로 손바닥 뒤집듯 반전을 꾀한다. 사실 이 모두는 ‘철없는 몽상’이라고. 인간수명만 놓고 볼까. 평균기대수명은 지난 100년 동안 두 배가 늘었지만 100년 후 다시 두 배로 늘어난다는 보장은 못한다. 사실 100년 전 자연수명도 80~90세였다니까. 17세기 사람 아이작 뉴턴도 84세를 살았고 15세기 사람 미켈란젤로는 88세까지 살았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의학적 성취란 건 그저 대부분의 사람이 90세까지 살 수 있다는 걸 입증하는 수준이란 거다.
게다가 문제는 ‘신이 된 인간’이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헷갈려 한다는 사실. ‘네 뜻대로 하라’는 인본주의 가치관까지 무너진 터에 기술력만 믿고 온탕과 냉탕을 오가다 어느 날 계산 하나만 삐끗해도 인간은 소멸의 수순에 접어들 수 있다고 했다.
▲당신의 옳고 그름은 데이터가 결정한다
하라리가 인본주의에서 결정적으로 빼내버린 건 자유의지다. 왜? 인간은 벌써 자유의지보다 테이터를 더 신봉하는 어떤 종교의 신자가 돼 있으니까. ‘위대한 알고리즘’이 교주로 있는 ‘데이터교’라는 거다.
과학이 부상한다고 신화·종교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 종교에선 스스로의 판단 따윈 사라지고 모든 건 인터넷에 맡긴다. 인간의 어떤 경험·판단도 믿을 수 없고 오로지 위대한 알고리즘의 분석에만 매달린다. 예컨대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범행 동기? 이런 건 다 우습다. 뇌에서 일어난 전기화학 반응을 들여다보는 게 더 설득력 있다는 거다. 만약 알고리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다면 그대로 퇴출이다. 표준에 못 미치는 전체를 배려할 필요를 더이상 못 느끼는 거다. 차라리 소수의 초인간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출발은 중립적인 과학이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데이터교’는 옳고 그름을 결정하겠다는 권한을 주장하는 종교로 변하는 중이다.
▲‘신이 된 인간’ 길을 잃다
고작 80년을 사는 인간이 인류 진화의 속도를 체감하는 건 무리란다. 그럴 거다. 인류사에서 진화는 감히 인간의 한 생으로 가늠할 덩치가 아니다. 하라리가 우려하는 건 갈수록 벌어지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된 지경이다. ‘신이 된 인간’이 길을 잃는 모양 말이다.
하지만 미래를 천국으로 또 지옥으로 만드는 건 결국 인간의 선택이란다. 맞다. 안다. 그런데 사실 이처럼 막연한 결말도 없다. 음악을 듣거나 미술품을 보는 대신 DNA 염기서열을 분석하고 인터넷에 부지런히 올려대는 것일 텐데. 자기개발 아닌 자기분석 말이다. 그럼에도 하라리는 이것은 예언이 아니고 예측이며 가능성이라고 대못까지 박는다. “먼 훗날 되돌아보면 인류는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흐름 속 잔물결이었음을 알 게 될 것”이라고. 결국 인간하기 나름이란 포석은 깔았지만 하라리 자체는 이미 디스토피아에 한 표를 던진 듯하다. 내 가능성이 거슬리면 미리 조심하라는 식이다.
‘사피엔스’의 속편이라 할 ‘호모 데우스’는 제목 자체가 경고였다. 블록버스터급 SF호러극 시나리오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다만 인간이 기계와 싸우지 않는 게 특이하다고 할까. 그래도 방심은 이르다. 대신 기계와 결합했으니까. 그렇게 인간 진화의 다음 모델을 또 구상하고 있나. 시작은 다이내믹했으나 마무리에서 힘을 너무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