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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진구 광장동에서 재건축을 추진 중인 총 60가구 규모의 유천빌라는 작년 7월 광진구청으로부터 신탁 방식 재건축의 ‘사업시행자 지정 고시’를 받은 이후 다음 절차까지 한발도 못 떼고 있다. 이 단지는 기존 지상 3층짜리 건물을 허물고 지상 7층에 99가구를 짓는 소규모 재건축 사업을 진행 중이다. 사업장 규모가 작은 만큼 주민들간 의사 결정도 빨라 속도감 있는 사업 추진을 기대했지만 신탁사와 주민 간 갈등으로 주요 안건을 상정하는 주민(토지등 소유자)총회가 번번이 무산돼서다.
유천빌라 주민 A씨는 “이곳 주민 대부분 신탁 방식 재건축에 대해 이해도도 낮았지만 사업 속도도 빠르고 비용도 절감해 주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탁방식을 택했다”며 “그러나 정작 신탁사가 내민 사업시행규정이나 계약서 등이 신탁회사에게 유리하게 돼 있고, 주민에겐 불리한 독소조항이 많아 이에 대한 수정 협의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신탁 방식 사업시행규정과 이를 기초로 한 사업 계약서에는 계약 당사자 간 지위와 역할, 사업비 조달과 관리·집행, 신탁 수수료 및 지급 방식, 시공사 선정 등이 담겨 있다. 계약을 체결한 이후에는 신탁사가 이를 기반으로 사업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자칫 주민들의 의견이 배제된 체 신탁사에 끌려다닐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할 법적 주민협의체가 없어 사업 추진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신탁사가 사업시행자로 지정 고시 되면 기존에 주민들이 꾸렸던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자동 해산되기 때문에 주민 대표기구가 없어진다. 이런 이유로 유천빌라의 경우 총 400억원에 달하는 재건축 사업의 주요 안건을 처리하는 총회때마다 주민 간 의견이 분분해 파행으로 치닫는 것이다.
유천빌라 측 한 주민은 “동 주민센터에서 60여명의 참석하는 주민 총회를 한번 여는데 1000만원 가까이 비용이 드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며 “주민 의견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탁사가 400억에 달하는 재건축 사업 주요 안건을 상정해 처리하겠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한때 신탁방식 붐이 일었던 여의도도 신탁 방식 재건축을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의도에서는 지난 2016년 시범아파트를 시작으로 대교, 공작, 수정아파트 등 총 7개 재건축 단지에서 신탁 방식을 택했다. 이중 시범아파트만 유일하게 한국자산신탁을 사업시행자로 지정했을 뿐 나머지 단지들은 사업시행자 지정도 못하고 있다. 이들 사업장 역시 총 사업비의 4~5%에 달하는 신탁 수수료와 사업비 조달 금리, 시행규정의 독소조항 등으로 반발이 생겨 사업시행자 지정을 위한 동의서 징구에 난항을 겪고 있어서다.
◇서울시, 신탁방식 정비사업 기준안 마련
신탁 방식 재건축 성공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광진구 자양동 일대 ‘대영연립 재건축 아파트’는 최근 광진구청으로부터 준공인가를 받았다. 이 단지는 지난 2006년 조합이 설립되고 2009년 7월 착공까지 들어갔으나 금융위기로 시공사가 부도를 내면서 장기 방치돼 왔다. 그러다 지난 2017년 신탁사가 이 사업에 합류하면서 자금 조달 문제를 해결하고 아파트 준공까지 골인했다.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정비업체) 관계자는 “정비사업 중간에 신탁사가 들어와 재건축을 성공한 사례는 있어도 최초 조합설립부터 아파트 준공까지 통상 10년이 넘게 걸리는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해본 신탁사가 지금껏 한 곳도 없다”이라며 “신탁사를 견제할 수 있는 주민대표 기구를 설립하고 주요 사업 안건은 협의해야 신탁방식 재건축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탁방식 재건축 사업 초기 단지마다 주민 간 갈등이 연이어 터지자 서울시도 신탁 방식 정비사업의 가이드라인 마련에 나섰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재 신탁사들이 쓰는 사업시행 규정은 과거 신탁사들이 만든 것이다 보니 일부 신탁사에게 유리하게 설계돼 있는 것으로 안다”며 “오는 3월말까지 관련 연구 용역이 끝나는 대로 사업시행규정 표준안을 마련하고 국토부와 협의를 거쳐 입법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