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칼럼] 부르다 그대가 죽을 이름이여 '노벨상'

오현주 기자I 2017.10.12 00:12:00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이쪽은 얼마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저쪽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교수고요.” 단상에 선 그들은 없다. 첩첩이 쌓인 책뿐이다. 굳이 얼굴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더 강력한 한 방이 있지 않나. ‘노벨상’이다. 서점가가 들썩이고 있다. 한국의 노벨상 러시는 이제부터다. 얼마 가진 않겠지만.

올해 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63). 그의 대표작인 ‘남아 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마’ 등 장편소설 7편은 국내에 모두 깔끔하게 번역돼 있다.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72)도 최소한 책으로는 낯설지 않다. ‘넛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들 저서에 ‘새삼’ 불이 붙었다. 딱 한 주 전과 비교해 최대 700배쯤 더 팔아낸 서점도 있다. 출판계가 모처럼 활기를 띤다면야. 그런데 말이다. 그토록 훌륭한 저작을 진작에 알아볼 수는 없었나.

올 초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현상을 꼬집었다. 상업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빈약한 한국문학에 냄비독서까지 겹친 비틀린 그림.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한강 빼고 1만부 이상 파는 한국작가가 없다”고. 그렇다면 ‘작가 한강’이 대안인가. 그것도 아니란다. 7∼8년 전 출간한 ‘채식주의자’는 그간 버림받은 품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친 듯 팔려나갔다. 상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그들은 제대로 읽긴 했을까. “대부분이 10장도 안 읽고 도통 이해할 수 없다며 덮어버리더라.”

뭐가 문제인가. ‘한국문학의 위기’가 일상용어가 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딱 끊어 10년 전만 보자. 2007년 11월 한 지상파 9시 뉴스는 ‘위기의 한국문학, 역사소설로 활로 찾기’를 내보냈다. 작가 김홍신이 대하소설 ‘대발해’를 출간한 즈음이다. 2015년 5월 한 통신사는 ‘쪼그라들고 외면당하고, 위기의 한국문학’이란 기획기사를 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한국문학이 싹 사라진 시점이었다. 올해 2월에는 문인협회가 한국문학의 위기를 들먹이며 격분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예진흥기금이 축소돼 “56회를 맞는 한국문학심포지엄이 없어질 처지”라고.

이제 봐야 한다. 한국문학의 진짜 위기가 뭔지. 전혀 위기스럽지 않은 아니 친숙한 레퍼토리가 된 ‘한국문학의 위기’가 그거다. 계속 위기라면서, 해마다 그렇다면서 어찌 이리 꼼짝도 안 할 수가 있는가. 어디서든 한마디씩은 보탠다. “그럴 수도 있지. 꼭 봐야 해?” “난 소설을 안 좋아해서.” “먹고살기 바쁜데 문학은 무슨.” 그러다가 엉뚱하게 끝나기 십상. “그래서 너는 몇 권이나 봤는데?” “왜 이래? 난 ‘채식주의자’는 봤어.”

오해는 마라. 설마 노벨상을 또 놓쳤다고 이러겠나. 입안에 잘못 들어와 거끌거리는 모래알 때문이다. 노벨상은 10월이면 찾아오는 ‘입안의 모래알’이다. 한 해 내내 문학과는 담을 쌓았다가 노벨문학상 앞에선 목소리를 높이는 그대들 탓이다. “이제 한 번 받을 때가 된 거 아니야?” 그 ‘받을 때가 된 이’도 10년 넘게 ‘단독후보’다. 시인 고은(83). 시달림에 지친 그는 몇 해 전부터 10월이면 해외로 나선단다.

노벨상은 개인기가 아니다. 시스템이다. 문학상이라고 다르겠나. 몇몇 대형작가의 펜 끝만 바라보다가 시즌에 맞춰 엉뚱한 책을 사러 서점가로 몰려간다면. 노벨상은 영원히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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