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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유독 여인이 많다.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아 장사를 하든, 빨래터에서 방망이질을 하든, 앞마당에서 절구질을 하든 그이들은 그냥 쉬는 법이 없다. 아이를 업거나 물건을 이거나 늘 무겁다, 이 여인들은. 흰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은 한결같은 차림새만큼이나 표정은 늘 덤덤하다. 웃을 일이 없던 시절이다. 전쟁통 혹은 직후의 생활고를 온몸에 짊어졌으니까. 그네들 중 특별한 ‘두 여인’이 돌아온다. 54년 만이다.
박수근(1914∼1965)의 ‘두 여인’(1963)이 3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본사에서 진행하는 ‘8월 경매’에 나선다. 박수근이 타계하기 이태 전인 1963년 서울 반도화랑에서 최초로 거래한 작품이다. 반도화랑은 1956년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들어선 국내 최초의 상업화랑. 그곳에서 처음 팔렸던 ‘두 여인’은 54년간 개인소장품으로 숨죽이고 있었다. 경매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두 여인’을 앞세운 이번 경매 역시 근현대 대가들의 그림잔치가 될 듯하다. 김환기·천경자·장욱진을 비롯해 유영국·도상봉·이인성·김창열 등의 명품이 줄지어 새 주인을 찾는다. 단색화 열기도 그대로 이어진다. 정상화·박서보·윤형근·이우환·류경채 등의 수작이 대거 나섰다. 최근 강세를 보이는 고미술품도 낙점을 기다린다. 조선시대 책거리 그림 중 가장 뛰어나단 평가를 받는 송석 이응록의 ‘책가도 8폭 병풍’, 겸재 정선의 ‘해주허정도’ 등이 대기 중이다. 총 202점, 높은 추정가로 130억원어치다.
△김환기 ‘서정추상’ 경매최고가 출품
모처럼 전면점화를 벗은 김환기의 추상화·드로잉 등이 여러 점 나섰다. 특히 이번 경매서 최고가로 출품한 ‘사운딩(Sounding) 3-Ⅷ-68 #32’(1968)은 김환기가 뉴욕으로 옮겨가 모험을 시도하던 때에 그린 서정추상. 단박에 눈길을 끈다. 소리를 형상화한 이미지로 177×126㎝의 거대한 캔버스를 채운 작품이다. 후기 전면점화로의 이행이 엿보이는 부분적 점·획과 선·면의 구성이 도드라진다. 전체적인 조형요소는 절제돼 있다. 붉고 노랗고 푸른색의 굵은 띠가 완곡한 가로선을 그어 담백한 회색바탕을 감싸는 형상이다. 추정가는 15억∼25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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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환기’를 만든 초석이라 할 만한 ‘드로잉 39점’도 한꺼번에 응찰을 기다린다. 1959∼1960년에 걸쳐 작업한 것으로 추정하는 드로잉은 22×17㎝의 일률적인 크기로 김환기 작품세계의 변화를 그대로 담아낸 의의가 있다. 초반에 명확했던 달과 산의 형태가 단순해지면서 선과 도형의 기하학적 패턴으로 옮아가는 모양. 39점을 통틀어 3억 5000만∼5억원의 가격표를 달았다.
박수근의 ‘두 여인’은 4억 8000만∼8억원에 새 주인을 찾는다. 두 아낙이 노상에 주저앉아 각자의 깊은 시름에 빠진 모습을 잡아낸 그림은 박수근의 토속정서를 온전히 투영하고 있다. 특별한 건 그림 뒷면에 작가가 별도로 기입한 한글·영문 친필 서명과 연도. 소장가치가 높다는 얘기다.
천경자의 ‘여인’(1975)도 추정가 3억 2000만∼5억원을 내걸고 주인찾기에 나선다. ‘미인도’ 논란에도 꾸준한 천경자의 이번 작품 역시 꽃으로 치장했지만 감출 수 없는 외로움을 품은 애잔한 여인상이다. 이외에도 근현대 대표작가의 작품이 줄지어 나선다. 장욱진의 ‘나무’(1986), ‘싸리문 집’(1985)이 각각 높은 추정가 2억 5000만원에, 유영국의 ‘나무’(1981)가 6000만원∼1억원, 이인성의 ‘풍경’(1942)이 1억 9000만∼2억 5000만원에 출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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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책가도 대가 ‘녹청색 병풍’ 최소 10억원
고미술품부문에서 단연 화제가 된 작품은 조선 말기 송석 이응록의 ‘책가도 8폭 병풍’이다. 책가도는 여러 칸으로 나눠 꾸민 책장 정도로 보면 된다. 궁중서 제작해 전통장식화나 민화에까지 영향을 미친 회화장르다. 150×380㎝에 달하는 ‘책가도 8폭 병풍’의 특징은 녹청색 바탕. 3대째 책가도를 이어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꼽히는 이응록의 작품 중 경매로 처음 선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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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록의 책가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독특한 ‘개명활동’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이응록은 이형록(1808∼1864), 이응록(1864∼1872), 이택균(1872∼?)으로 이름을 바꾼 화원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름을 바꿀 때마다 책가도의 바탕색도 따라 바뀌었다는 것. 그 시기에 맞춰 갈색-녹색-녹청색-청색으로 변화를 거듭했다. 이번 경매에 나선 책가도가 바로 이응록 시기의 녹청색 작품인 거다. 추정가를 미리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등이 소장한 가치에 비춰볼 때 최소 10억원 이상의 낙찰가를 예상한다.
겸재 정선의 ‘해주허정도’(연도미상)도 주목할 만하다. 황해도 해주의 허정과 주변 절경을 담은 수묵담채화다. 담묵의 필치로 화면 전체를 채운 뒤 담청으로 채색해 맑고 투명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추정가 2억 2000만∼3억 5000만원에 나서 진경산수 거장의 명작을 알아볼 새 주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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