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전에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우리나라 작가들이 거론되곤 했지만 번번이 수상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한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면서 작품 내용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는 번역의 문제가 꼽혔다. 노벨문학상은 작가의 개인적 역량이나 작품의 문학성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섬세한 감정과 뉘앙스, 문화·역사적 배경까지 전달해야 하니 비영어권 문학에서 유능한 번역가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 할 것이다. 그리고 2016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할 때 이를 영문으로 옮긴 데보라 스미스가 주목받으며 많은 이들이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번역가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언어의 장벽을 해소해주는 ‘번역’에 대한 인프라는 부족한듯하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올해 예산은 전년보다 14% 삭감됐고 번역 출판 지원사업 예산도 올해 20억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번역가 역시 엄연한 창작자란 인식이 부족하다. 번역은 단순히 다른 나라의 언어로 변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원저작물에 담긴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해석해 다른 나라의 언어로 표현하는 창작적 행위이다. 그래서 같은 구절이라 하더라도 번역가마다 문맥의 흐름에 대한 해석과 옮긴 표현이 모두 다르고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창조적 개성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저작권법적 관점에서 보면 번역가의 번역물은 ‘원저작물을 번역·편곡·변형·각색·영상제작 그 밖의 방법으로 작성한 창작물인 2차적 저작물‘로서 보호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타인의 번역물을 무단 복제하거나 사용하는 일도 많고, 번역을 창작행위로 보기보다는 보조적 역할로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다.
언어의 장벽으로 좋은 작품이 다른 언어권 사람들에게 가 닿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신체의 장벽으로 좋은 작품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경우도 존재한다. 몇 년 전 프로 보노(pro bono)로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영화 해설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에 법률 자문한 적이 있다. 배리어프리 영화란 시각장애인용 음성 화면해설과 청각장애인용 한글 자막이 삽입된 영화를 뜻한다. 누구는 아무런 제약 없이 보고 듣는 장면을 누군가는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에도 사각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럼에도 현실은 영화사나 배급사와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여전히 많은 영화들이 배리어프리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문화예술이 인류에 기여하는 바는 세상에 다양성의 씨앗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반기를 들고 색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서로 다른 타인과 소통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예술이 진정으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동등하게 여러 사람이 향유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언어, 신체적 장애, 어떠한 장벽 없이도 누구나 예술적 경험을 향유할 수 있도록 노력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