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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의 그림&스토리]<12>풍파 새긴 못난 돌, 상처 아닌 훈장이오

오현주 기자I 2021.04.30 03:30:00

▲김유근&허련 '괴석도'로 본 '노경의 미'
돌 사랑한 동양문화가 만들어낸 '돌의 미학'
조선세도가 김유근 추사에 돌그림 보내기도
허련은 깨지고 뚫려도 늘 굳건한 자태 담아
변화무쌍 인간세상 속 영구불변 가치 알려

김유근의 ‘괴석도’. 타고난 모양이 괴상한 돌을 그리고 ‘정신이 뛰어나 귀한 거지 모양이 뛰어나 귀한 거냐’란 글을 붙였다. 절친이던 추사 김정희에게 ‘함께 보자’며 보낸 그림과 글이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다. 종이에 수묵, 16.5×24.5㎝, 간송미술관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한국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도 화제였지만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야말로 한국영화 ‘기생충’의 천하였습니다. 한 부문에서라도 상을 받길 바랐는데 무려 4개 부문 수상이란 쾌거를 전해줬습니다. 수상소식을 접하곤 환호성을 지를 뻔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사에 새긴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였습니다. 영화를 봤다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야기의 시작은 아들의 친구가 유학을 떠나며 아들에게 맡긴 수석(壽石)에서 비롯됩니다. 수석은 큰 상징적 의미로 영화 내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과연 ‘서구의 외국인들이 수석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이후 외국인들도 돌을 감상하는 동양의 문화를 조금은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렇듯 동아시아에는 돌을 감상하고 즐기는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고대에는 돌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위에 암석화를 그렸고 성혈을 팠으며 마애불을 새겼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바위가 많은 덕에 돌을 깎아 불상을 만들고 탑을 세우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인공석굴(‘석굴암’)도 조성했습니다. 돌을 아끼고 사랑하는 문화는 이후 조선에까지 이어져 희귀한, 괴상한 모양의 돌을 감상하는 일이 대유행했는데 이런 문화를 반영한 그림을 ‘괴석도’(怪石圖)라 하며 많이들 제작했습니다. 그중 조선후기 문신 황산 김유근(1785∼1840)의 ‘괴석도’를 살펴볼까 합니다.

그림에는 마치 과학도감에서 운석을 소개하듯 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돌은, 물기를 적게 사용하는 갈필로 매우 거칠게 표현했고 모양도 깨지고 파여 매끄럽고 얌전한 수석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놓인 형태도 아래가 좁고 위는 넓어 다소 불안정해 보입니다. 그것을 의식했는지 돌의 왼쪽 움푹 파인 부분 아래에 서명과 인장을 남겼는데 마치 돌을 받치듯 사선으로 쓰고 배치한 점은 작가의 의도적 구성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시를 위에 적어 역시 머리가 무거운 그림이 됐습니다. 이런 구성은 다소 아쉽지만 이 작품은 감상용 그림이 아니고 편지란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시에 적어 넣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귀한 바는 정신이 빼어남인데 어찌 형사(形似)를 구하리까. 같이 좋아할 이에게 드리노니 벼루상 머리에 놓아두소서. 황산이 직접 씀.” 또 아래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겨울밤 추사(秋史) 인형(仁兄)을 위해 그립니다 황산.”

◇돌을 함께 감상한 옛 선비들의 풍류

글의 내용으로 보아 그림은 김유근이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그림입니다. 김유근은 당시 최고 세도가 안동 김씨의 중심인물인 김조순의 아들입니다. 김정희와는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집이 떨어져 있었지만 당시 경복궁은 폐허였기에 한 동네에서 자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이 아버지 김조순과 추사의 생부 월성위 김노경도 인연이 있어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김유근과 김정희는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내서인지 돌을 감상하는 취미도 같았던 듯합니다. 작품은 아마도 김유근이 새로운 돌을 구하게 되자 그림을 그려 추사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돌을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 벗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런 방식으로 전했던 것입니다. 옛 선비들의 풍류와 낭만이 참 멋지지 않습니까.

김유근은 서화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갈필을 이용한 문기(文氣) 넘치는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최고 권세가의 장남인 데다가 관직운도 좋았던 김유근은 군권을 총괄하는 판동녕부사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42세에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해 가던 중, 면회 요청을 거절 당한 어느 전직 관원의 앙심을 품은 피습으로 가족 5명이 흉변을 당하는 아픈 개인사도 겪었습니다. 그뒤 51세에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4년간 실어증으로 고생하다가 숨을 거뒀습니다. ‘괴석도’는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인 1835년 이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또 다른 ‘괴석도’ 한 점을 더 보겠습니다. ‘괴석’을 감상하기에 아주 좋은 작품이라 할 이 그림은 조선후기 서화가 소치 허련(1809∼1892)이 그렸습니다. 허련은 김정희의 제자로 스승에게서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란 칭찬을 받은 실력 있는 화가였습니다.

허련이 그린 ‘괴석도’. 모양이 괴상하다기보다 상처투성이라 괴석이다. 남종화가 가진 문장의 기세와 화풍을 추구했지만 괴석을 스치는 붓질과 제시를 쓴 필치에서 스승인 추사 서체의 잔영이 보인다고 평가한다.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 49.6×31.3㎝, 호암미술관 소장.


화면 가득 바위 하나를 그린 허련의 ‘괴석도’는 굵고 진한 농묵으로 거친 테두리를 표현했고 담묵과 채색을 적절하게 혼용해 정형화되지 않은 둔탁한 돌의 질감을 잘 표현했습니다. 좌우 여백이 거의 없이 화면 가득 바위를 그린 이유는 바위의 성기고 험한 질감을 한껏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듯 상처투성이에다 구멍까지 숭숭 뚫려 뼈만 남은 듯한 모습입니다.

◇“암석은 천지의 뼈” “아무도 침노하거나 제압할 수 없다”

괴석 중에 이렇듯 구멍이 뚫리고 까만 돌을 따로 ‘태호석’(太湖石)이라 부르는데, 중국 절강성 소주 쪽에서 많이 나오며 괴석 중에서는 가장 좋은 돌로 인정을 받습니다. 일반인에게는 그냥 깨진 돌로 보이지만 허련의 눈에는 신비하고 경이로우며 예술적으로 보였을 겁니다. 구멍이 뚫린 것만 빼면 그의 괴석은 고향인 해남과 진도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의 모양과 질감입니다. 허련이 49세에 진도 운림산방으로 낙향한 후 남도를 대표하는 남종문인화가로 뿌리를 내리게 된 이유는 이처럼 남도의 정서와 풍토를 반영한 작품을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예술, 특히 조형미술은 자연의 모방에서 비롯합니다. 그래선지 동양의 예술가들은 자신이 아름답게 생각했던 돌에 큰 애착을 가졌습니다. 중국 육조시대 동진의 화가 고개지(344∼406)는 사람의 모습을 바위 속에 그렸고, 송나라 서예가 미불(1051∼1107)은 바위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형님으로 부르며 절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북송 때 곽희(1020?∼1090?) 는 “암석은 천지의 뼈”라고 했으며 고려 말 시인 이곡(1298∼1351)도 “견고 불변하고 흔들어 움직일 수 없으며 아무도 침노하거나 제압할 수 없다”며 바위의 덕을 칭송했습니다.

조선시대 윤선도(1587∼1671)도 ‘오우가’(五友歌)에서 자신의 벗은 수석과 송죽이라며 스스로 ‘애석인’(愛石人)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돌의 예찬 중 가장 큰 부분은 변하지 않는 영구불변성입니다. 수시로 흔들리고 변하는 인간 세상에서 변치 않고 한결같은 모습을 간직한 돌·바위의 성질을 유교적 윤리관으로 투영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모양이 아니라 깨지고 부서져 구멍까지 뚫렸어도 여전히 굳건한 모습에 마음을 뺏긴 것입니다. 그래서 김유근도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했을 겁니다.

영구불변한 성질은 자연스럽게 장수로 연결돼 돌은 십장생 중 하나로 당당히 포함됐습니다. 이는 ‘괴석도’의 감상 포인트를 ‘노경(老境)의 미’를 발견하는 데 두는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구멍 뚫린 바위를 그린 허련의 ‘괴석도’를 보면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세상 모든 아버지가 그랬듯 평생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사회 낮은 곳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면서 몸은 깨지고 상처투성이가 됐습니다. 몸 곳곳이 성치 않아 매일 약을 한 움큼씩 삼키며 늘 병원에 다녀야 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잘 버텨내는 모습이 ‘괴석도’와 같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괴석도’가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듯 세상 모든 아버지의 건강하고 단단한 모습이 오래도록 자식의 감동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남종문인화

중국 산수화를 남종·북종으로 구분하던 데서 비롯됐다. 두 화풍 중 남종(문인)화는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담채를 써서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조선에서는 중기 이후 한국화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스며든 조선후기(1700∼1850)에는 조선의 산하를 모방이 아닌 실경으로 그린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를 많이 그렸던 시기. 조선만의 분위기를 형성해갔던 그때에도 남종화는 꾸준히 확산해갔다. 특히 19세기에는 추사 김정희와 그 주변인물들을 중심으로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됐는데, 추사의 절친 김유근, 제자 허련도 그 세계에 속해 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답습이 아닌 변형 혹은 진화가 보인다. 서예성을 강조한 스케치풍이 그거다. 대표적인 예가 김정희의 ‘세한도’. 하지만 추사 이후 조선의 남종화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조선 말기 화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양식으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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