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서 ''회천'' 전 연 광부화가 황재형
39년전 화업 위해 무작정 광부의 길로
탄광 노동자 일상 리얼리즘으로 그려
광부 식사 그림에선 자신 모습 담기도
근래엔 태백서 공수한 머리카락 소재
절망·희망 교차시킨 삶의 깊이 녹여내
| 황재형의 ‘식사’(1985). 광부들이 막장에 갇힌 시간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때라는 점심시간, 식사 장면을 그렸다. 서로의 랜턴 빛에 의지해야 내 밥이 보인다고 했다. 화가는 화면 상단 오른쪽 끝에 앉은 광부가 자신이라고 일러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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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캄캄한 어둠 속에선 서로의 랜턴 빛에 의지해야 그나마 내 밥이 보인다. 막장에 갇힌 시간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때, 식사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러곤 애틋하게 그림을 바라보던 화가가 뜻밖의 한마디를 던진다. “저들 중 내가 있다.”
칠흑 같은 갱도 끝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말없이 젓가락만 움직이는 무리의 사내들. 화가는 손끝으로 그중 한 사람을 가리킨다. 여느 광부와 다르지 않은 몰골. 저이의 머리에도 랜턴 빛은 삐져나오고, 얼굴에는 숯검댕이 번뜩인다. 앞사람의 쭈그린 어깨너머로 어슴푸레, 입 언저리로 가져간 밥 한 뭉텅이도 보인다. 넓은 작업실, 환한 갤러리도 아닌 탄광 속 화가라니. 그림 옆엔 ‘식사’(Lunch·1985)란 단출한 타이틀만 붙어 있다.
| 황재형의 ‘식사’(1985) 중 부분. 화가는 오른쪽에 보이는 얼굴이 갱도 안에 있던 자신이라고 일러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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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화가 지망생이 강원 황지(‘태백’의 옛 지명) 탄광촌에 정착한 건 1982년. 중앙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직후였다. 신입적자(일용노동자)로 광부의 길을 자처했던 터. 태백·정선·삼척 등지에서 붓·물감 대신 잡은 곡괭이·석탄과의 사투가 3년여간 이어졌다. 온통 검정뿐인 탄광촌, 말라비틀어진 폐광촌을 문신 새기듯 온몸에 기록한 그이는 이후 그 짙은 흔적을 화폭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광부화가 황재형(69). 육체에 덮인 광부로서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에 심각한 질환이 생겨 더 이상 갱에 들어갈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정신에 씌운 광부로서의 삶은 평생 이어졌다. 아니 벗겨내질 못했다. 어찌 뽑아버리겠는가. 절망을 캐는 게 전부여도, 구차하지만 차마 버릴 순 없는 희망 한줄기 품었던 동료들이 늘 눈에 밟히는데, 지하 몇백미터 아래 가둬놔도 꿈틀대는 그 지독한 생의 본질을 같이 겪어봤는데. 그래서 그이는 아직도 광부화가로 산다.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 광부화가 황재형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연 ‘회천’ 전에 건 자신의 작품들 앞에 섰다. ‘실없는 소리’(1986), ‘선탄부 권씨’(1996), ‘광부 초상’(2002) 등 탄광촌의 일상과 광부들의 얼굴 등을 그린 소품들을 따로 모아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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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연 대규모 회고전은 그 검고 푸른 흔적을 모아놓은 자리다. ‘회천’(回天)이란 테마를 달았다. ‘천자의 뜻을 돌이키거나 혹은 형세를 바꿔 일으킨다’는 뜻. 그렇게 하늘을 움직일 태세였는지, 무섭도록 진하게 가둔 삶의 이면 65점이 막장 랜턴 빛에서 빠져나와 미술관 조명 빛 아래 걸렸다.
◇“광부 삶을 그냥 소재로 쓰는 게 걸렸다”
39년 전 무작정 탄광촌으로 향했던 건 아니다. 화가의 결심을 재촉했던, 한 작품이 전시의 시작점으로 긴 여정을 연다. ‘황지 330’(1981). 대학 재학 중 그렸던 이 작품은 어느 광부의 죽음에서 비롯됐단다. 1980년 황지탄광에서 매몰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낡은 작업복을 그린 거다. 폭 130㎝ 높이 227㎝에 달하는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건 주머니에 걸린 신분증과 가슴에 수놓인 ‘황지 330’. 설사 그가 다른 누구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황지광업소에서 일하는 광부 330번.
| 황재형의 ‘황지 330’(1981). 황재형을 광부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다. 1980년 황지탄광에서 매몰사고로 사망한 광부의 낡은 작업복을 그렸다. 왼쪽 주머니 위에 ‘황지 330’이 선명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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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작품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제5회 중앙미술대전’(1982)이 장려상까지 안겨주자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이 생겼던 거다. “광부들 삶을 그냥 소재로 쓴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걸렸다. 구경꾼, 사기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시욕에 들떠 상이나 바랐던 게 아닌가 싶어 탄광으로 가자 결심했다.”
홀몸도 아니었다.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까지 대동했다. 안경도 벗었다. 안경은 광부가 되는데 결격사유란다. 그걸 숨기고 콘택트렌즈를 낀 채 갱에 들어갔던 게 실명위기를 불렀고, 결국 퇴출됐던 거다. 전시장에는 ‘식사’ ‘황지 330’ 외에 ‘외눈박이의 식사’(1984∼1996), ‘산업전사’(1982) 등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그때 그 현장을 옮겨놨다.
| 황재형의 ‘작은 탄천의 노을’(1990/2008). 건강 때문에 광부 신분을 박탈당한 뒤에도 탄광 근처를 맴돌던 화가의 눈에 든 건 몰락해가는 폐광촌. 작품은 폐수시설조차 없어 썩은 물이 흐르는 탄천 위에도 찬란한 노을이 내려앉는 고즈넉한 풍광을 잡아낸 수작으로 꼽힌다. 1990년에 그린 동명의 그림을 다시 제작한 2008년 작품이 전시장에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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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광부도 아니면서 탄광 근처를 얼쩡대는 삶은 계속됐다. 이번에 발목을 붙든 것은 1989년 나라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에 따라 몰락해가는 탄광이었다. 사람이 빠진 폐광의 모양이 자꾸 눈에 들어왔단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탄광촌(‘고한’ 2011)은 이내 가질 수 없는 걸 탐하는 환락의 늪(‘욕망’ 2008)이 됐고, 그럼에도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질퍽한 시름으로 남았다(‘철암역’ 1984∼2006). 이 시기 그이의 수작으로 ‘작은 탄천의 노을’(1990/2008)이 꼽힌다. 폐수시설조차 없던 탄광촌, 썩은 물이 흐르는 탄천 위에도 찬란한 노을이 내려앉는 고즈넉한 풍광을 잡아낸 작품이다.
| 황재형의 ‘겨울잠’(2006). 매서운 강원의 눈보라가 내려앉은 겨울풍광은 자주 그이의 시선을 붙들었다. 판잣집 위에 내려앉은 가난까지 얼어붙은 폐광촌의 지독한 겨울을 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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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재형의 ‘백두대간’(1993∼2004). 11년에 걸쳐 완성을 본, 206.4×496㎝에 달하는 역작 중 역작이다. 산과 산이 첩첩이 쌓인 끝없는 행렬에 그는 어렵게 종지부를 찍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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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아닐 때는 산으로 향했다. 통리재를 배경으로 한 ‘백두대간’(1993∼2004)은 역작 중 역작이다. 높이 206.4㎝, 폭 496㎝에 달하는 작품은 11년에 걸쳐 완성을 봤다. 산과 산이 첩첩이 쌓인 끝없는 행렬에 그는 어렵게 종지부를 찍었다. 매서운 강원의 눈보라가 내려앉은 겨울풍광은 자주 그이의 시선을 붙들었다. 진짜 흙으로 흙산에 뒤엉킨 눈덩이를 그린 ‘어머니’(2005), 판잣집 위에 내려앉은 가난까지 얼어붙은 ‘겨울잠’(2006) 등도 이즈음 작품이다. 하나같이 인간이 사라진 풍경에도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을 심어낸 것들이다. “산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산을 닮고, 광부의 표정은 집의 표정이며, 산의 표정은 그곳 사람들의 표정”이라고 했더랬다. 그래선가. 그가 본 산등성이의 주름은 그가 그린 광부 얼굴의 주름에 빈번히 오버랩됐다.
◇“막장은 태백만이 아니라 서울에도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한 노인의 얼굴을 파들어간 그 주름은 유독 아프다. 한때는 산업전사였다. 이젠 “다 탄 연탄재처럼 설 자리가 없는 은퇴한 광부”일 뿐이다. 나라와 자식에 자신을 내준 어느 광부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아버지의 자리’(2011∼2013)는 광부화가의 ‘제3기’에 등장했다.
| 황재형의 ‘회천’ 전 전경. 나라와 자식에 자신을 내준 은퇴한 어느 광부를 그린 ‘아버지의 자리’(2011∼2013·왼쪽) 안쪽으로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탄광촌의 시름을 드러낸 ‘고한’(2011·부분)과 그 틈에 끼어든 환락의 늪을 그린 ‘욕망’(2008)이 차례로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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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인 10여년 전부터 화가는 물감 대신 독특한 소재를 꺼내 들었는데 ‘머리카락’이다. 태백에 있는 미용실이란 미용실에서 모조리 공수받은 머리카락을 캔버스에 덕지덕지 붙인 작품이 차례로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의 자리’에 모델로 나섰던 광부를 머리카락으로 다시 풀어낸 ‘드러낸 얼굴’(2017)을 앞세워, 탄광으로 들어가는 철로에 멈춰선 수레는 ‘잔설’(2017)로, 광부들이 모처럼 한자리에서 포즈를 취한 ‘별바라기’(2016), 바람만 남은 황량한 동네풍경을 묘사한 ‘나한정에 부는 바람’(2017) 등이 전시장에 걸렸다. 왜 굳이 머리카락인가. “생명 순환 논리의 증거물이 아닌가. 어떤 사람을 대신하는, 인류의 최초이자 마지막 옷이다.” 그 증거물인 머리카락으로 삶의 기록을 담아내는 게 뭐가 특별하겠느냐는 거다.
| 황재형의 ‘잔설’(2017). 10여년 전부터 시작한 ‘머리카락 그림’ 중 한 점이다. 강원 태백의 미용실에서 공수받는다는 머리카락으로 이젠 멈춰버린 선로 위의 수레를 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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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화가 황재형을 우린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대표화가’라 부른다. 묘사가 어떻든, 표현이 어떻든 그이의 리얼리즘은 ‘사람 사는 도리’였다. 이는 “막장이 태백에만 있는 것 같은가. 서울에도 있다”는 생각으로 모였다. 그러니 “시대극복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이걸 놓치면 미술은 그저 자기과시일 뿐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못다한 게 있는가 보다. 여전히 그이는 그곳에 산다. “내가 화가인데 광부가 되겠다고 진짜 광부야 됐겠는가. 난 그저 그들과 막장에 머물렀을 뿐이다.” 전시는 8월 22일까지.
| 작업실의 황재형.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연 ‘회천’ 전에 소개한 인터뷰 영상을 다시 촬영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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