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경마장 출입금지라면서요? 언니를 보면 말(馬)이 안 나와서’, ‘○○이 사진 예뻐서 이마 쳤더니 거북목 완치됨’
취업준비생 김현수(26·남)씨는 최근 유튜브에서 이같은 소위 ‘주접 댓글’을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구독 중인 크리에이터를 칭찬하는 과장된 표현에 즐거움을 느껴서다.
재치 넘치는 주접 댓글을 보면 ‘좋아요’를 누르거나 화면을 갈무리해 저장하기도 한다. 김씨는 “취업 준비로 힘이 들 때 기발한 주접 댓글을 보며 작은 위로를 받는다”고 전했다.
댓글이 주접을 떨고 있다. 익살스럽고 기발한 표현을 한 줄에 담아 실소를 자아내는 주접 댓글 얘기다. 어디서든 즐거움을 추구하는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 출생) 누리꾼이 이끄는 온라인 문화다.
이들은 ‘좋아요’를 눌러 ‘어떤 댓글이 주접을 잘 떠는지’ 냉정하게 판단한다. 기발한 주접 댓글이 모이는 곳은 곧 ‘댓글 맛집’으로 소문이 난다. 댓글창이 원본 콘텐츠와 연결된 또 다른 놀이의 장(場)이 된 모습이다.
요즘 굴이 제철이래, 네 얼굴...맥락 벗어난 말장난에 실소
주접 댓글은 과장된 표현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댓글을 가리킨다. 추하고 염치없게 행동함을 이르는 ‘주접떨다’라는 동사가 누리꾼들에 의해 긍정적인 의미를 얻었다.
주접 댓글은 뻔한 칭찬을 가장 경계한다. 허풍과 재치를 능청스럽게 섞어야 살아남는다. ‘너 오늘 좀 허전하다, 명불허전’, ‘요즘 굴이 제철이래, 네 얼굴’처럼 맥락을 비튼 말장난이 핵심이다.
언어의 경계도 넘나든다. ‘저기요, 구멍 났어요. 황홀’, ‘너 때문에 전쟁 났대, 사랑스러워, 아름다워, 귀여워’는 영단어 ‘hole(구멍)’과 ‘war(전쟁)’를 소리나는 대로 우리말로 옮겨 만든 주접 댓글의 예시다.
짧은 한 줄에 재치 있는 서사를 담기도 한다. ‘상대방이 너무 좋아서 벽을 쳤더니 방이 세 개던 집이 원룸이 됐다’, ‘같이 박물관을 털다 네가 조각상인 척 해서 나만 잡혀갔다’는 식이다. 이야기가 참신할수록 주접의 매력은 커진다.
MZ세대 “밋밋함 피하고 유행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 경쟁”
MZ세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이같은 주접 댓글을 활발히 소비하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짧은 언어로 소통하는 일에 익숙한 세대 특성을 활용하는 것.
이들은 “유행을 주도하려는 MZ세대의 욕구가 주접 댓글이 인기를 얻은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주접 댓글을 즐겨 보는 최정윤(21·여)씨는 "'예쁘다, 멋있다'와 같은 단순한 표현보다 전달하려는 뜻을 강조할 수 있다"며 "같은 뜻이지만 참신한 말장난을 더해 듣는 사람도 더 기분 좋은 칭찬"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젊은 세대는 밋밋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새롭거나 재미가 있어야 흥미를 가진다"며 "유행을 이끌기 위해 독특하고 재밌는 콘텐츠를 생각하다 보니 주접 댓글이라는 문화가 나온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현수 씨도 “MZ세대는 주접 댓글을 마치 게시글처럼 정성스럽게 작성한다”며 “더욱 기발한 내용을 담기 위해 서로 즐겁게 아이디어 경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주접 댓글 읽어봤습니다’ 2차 가공 콘텐츠도 인기
‘레전드 주접 댓글 모음’, ‘주접 댓글 읽기 영상’ 등 참신한 주접 댓글을 재편집한 콘텐츠도 인기다. 주접 댓글의 당사자가 직접 댓글을 읽으며 반응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구독자 88만명을 보유한 음악 유튜버 ‘NIDA’는 지난해 3월 ‘한국 사람만 가능한 주접 댓글로 만든 노래’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그전까지 영상에 달렸던 주접 댓글을 노랫말로 활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한 것.
그는 “창의력 넘치는 댓글을 본 뒤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새로운 곡으로 보답하고 싶었다”며 재가공 영상을 만들게 된 계기를 밝혔다.
NIDA는 “처음 주접 댓글이 달렸을 때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었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웃음이 터졌다”며 “그냥 칭찬이 담긴 댓글을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고 주접 댓글을 접한 소감을 전했다.
그는 “말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주접 댓글은 이제 하나의 놀이 문화가 됐다”며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특별한 소통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접 댓글을 남기는 구독자에게)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 “댓글엔 다양한 콘텐츠화 가능성 있어”
전문가는 주접 댓글을 ‘기성 세대와 구분되는 MZ세대의 놀이문화’로 설명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젊은 세대에게 댓글은 하나의 소통 수단으로서 일상에 밀착돼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댓글의 표현 방식과 내용 또한 (댓글을 의견 표출 수단으로 여기는) 기성 세대와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댓글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는 분석도 전했다.
김 평론가는 “최근 ‘댓글 보는 재미에 빠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댓글도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며 “(주접 댓글의 사례처럼) 앞으로 다양한 콘텐츠 방식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유머는 젊은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가치”라며 “(주접 댓글은) 사소해 보이지만 일상에서 콘텐츠에 대한 반응을 나눌 수 있는 바람직한 놀이문화”라고 설명했다.
임 교수는 “과거 ‘허무개그’나 ‘아재개그’가 유행했다”며 “젊은 세대는 이처럼 ‘B급 감성’을 전달하는 가깝고 친근한 소재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스냅타임 윤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