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페인트가 오른 이유는 미국 화학기업 AOC 인수합병(M&A)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AOC는 코팅제 원료 등 특수한 화학품으로 구미에서 높은 점유율을 가진 기업이다. 이 회사의 매출액에 대한 에비타(EBITA·이자 비용, 세금, 감가상각 비용 등을 차감하기 전 영업이익)는 30%를 넘어 일본페인트(15%)의 2배가 넘는다.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양질의 기업인 데다가 30%가 넘는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성장하는 구미시장의 활로를 개척한다는 기대감이 주가에 반영됐다.
주식 취득액은 23억 400만달러(3조 1806억원)으로 순이자부채를 포함한 인수총액은 6300억엔(5조 6848억원)에 달하는 메가톤급 딜이다.
◇무차입 경영에서 적극적 M&A 통해 경쟁력 확충
눈에 띄는 것은 일본페인트의 메가톤급 인수합병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일본페인트의 인수 건수는 2018년 이래 40건을 넘었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한 것은 그 해 3월 일본페인트 최대주주였던 싱가포르 우트헬람(Wuthelam) 그룹의 회장 고 합 진이 일본페인트의 회장으로 취임한 해이기 때문이다.
2018년 이전만 하더라도 일본페인트는 이사 대부분이 사내 인재로 일본 대다수 기업과 비슷한 거버넌스였다. 그러나 고 회장이 이끄는 우트헬람은 일본페인트의 거버넌스 문제를 지적하고 이사회 10석 중 6석에 자신들이 추천한 후보를 임명할 것을 요구해 통과시켰다. 고 회장이 내건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미션에 해외기관 투자자를 중심으로 찬성표가 몰린 결과였다.
이날 이후 무차입 경영을 내세우던 일본페인트는 체질을 180도 바꿔 적극적인 M&A를 통해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페인트는 호주·뉴질랜드 점유율 50%를 차지하는 듀럭스(2900억엔), 터키의 도료회사 베텍(3005억엔), 프랑스의 건축용 페인트 및 코팅전문 기업인 크로몰로지(1500억엔), 카자흐스탄 아레나 그룹 등 수많은 해외 기업을 인수했다.
인수기업의 탄탄한 성장을 바탕으로 2018회계연도 12월 분기부터 2023회계연도 12월 분기까지 일본페인트의 순이익은 2.6배로 확대했다.
경영진도 고 회장의 이념에 공감하는 이들로 재구성됐다. 2021년 4월부터 취임한 와카츠기 유이치로 공동사장이 지향하는 것은 워런 버핏의 투자회사 버크셔 헤서웨이. 위험을 억제하면서 적절한 가격을 기업을 사고 기업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낸다는 것이 목표이다. 와카츠키 공동 사장은 닛케이에 “버핏과 같은 천재는 없지만 우수한 경영자가 있는 파트너 기업을 안고 체계적으로 자산을 쌓아 가겠다는 의미에서 유사점은 많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거버넌스 개선
일본페인트는 1881년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페인트 회사다. 이런 일본 백년기업의 지배주주를 한때 일본페인트의 아시아태평양 유통을 맡았던 싱가포르 회사가 되는 것에 대해 일부 언론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싱가포르 화교가 기업을 탈취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고 회장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페인트·코팅 회사 우트헬람 홀딩스의 설립자인 고청량의 장남이다. 고청량은 1949년 영국군이 팔던 전쟁물자 경매에서 페인트를 구매해 색을 섞고 용매를 첨가해 자신의 브랜드인 피죤 페인트를 만들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교역로가 차단되고 물자 공급이 어려워지면서 그의 페인트 사업이 크게 성장했다. 1959년 일본페인트가 고청량에게 자신들의 페인트를 팔아달라고 제안한 것을 시작으로 1962년 일본페인트와 우트헬람이 합작한 입시(Nippon Paint Southeast Asia Group·NIPSEA) 그룹이 탄생했다.
고 회장은 1980년대부터 입시와 일본페인트의 이사로서 일해왔다. 도쿄대학 공학부를 졸업해 일본어도 유창하다고 한다. 그런 고 회장이 일본페인트의 인수를 사실상 추진한 것은 2013년이었다. 그러나 양사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우트헬람의 일본페인트 출자비율을 14%에서 39%로 올리는데 그쳤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영향력을 큰 우트헬람이 출자비율을 높인 후,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페인트 해외 매출 비율은 30%에서 70%까지 오르며 매출은 2.6배 올랐다.
고 회장은 이후에도 일본페인트 체질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2018년 이사회 과반을 우트럼이 추천한 사외이사로 바꾸는 데 성공하고 자신은 회장직에 취임한 것도 잠시, 이듬해 3월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 부사장 출신인 다나카 마사아키가 회장으로 취임했고 고 회장 자신은 이사직으로 물러났다. 이때 다나카를 회장으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고 회장이었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으로 ‘싸움마사’라는 별칭이 있는 다나카 씨는 일본 국부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 사장으로 임명됐으나 정부와의 충돌 속에 사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보상 때문에 일본페인트 회장직을 맡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글로벌 기업을 목표로 개혁에 임하는 경영진의 자세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그 해 8월 일본페인트는 우트헬람으로부터 추가출자를 받아 자회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우트헬람 출자비율은 58%로 증가, 우트헬람은 명실상부한 일본페인트의 지배주주가 됐다. 일본페인트는 증자로 얻은 1조 3000억엔은 우트헬람이 가지고 있는 입시 지분을 매수해 완전 자회사하는 데 사용했다. 싱가포르 회사가 일본기업을 빼앗은 것이 아니냐는 여론에 다나카 당시 회장은 “일본페인트와 우트헬람의 사실상 합병”이라며 “이로 인해 순이익은 60% 늘어나고 1주당 이익(EPS)는 제3자 할당증자에 따른 주식 증가를 고려해도 10%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입시가 일본페인트에 흡수되면서 중복투자를 막는 등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2021년 4월 일본페인트는 싱가포르 출신으로 일본페인트 해외 영업을 맡았던 위 슈킴 부사장과 금융기관에서 M&A를 다룬 와카츠키 전무집행이사를 공동 사장으로 임명했다. 다나카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문으로 물러나고 고 회장이 대표권이 없는 회장으로 복귀하면서 현 체제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