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수사는 무기력했다. 범인의 윤곽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헛다리만 짚었다. 이러한 와중, 약 5개월 후 검거된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내가 이문동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유 씨의 범행으로 확신하고 현장검증까지 벌인 후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었다. 당시 TV 뉴스를 통해 이같은 상황을 지켜보던 정남규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이와 관련 당시 수사 팀장은 2021년 한 시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남규가 검거된 후 ‘2년 전 이문동에서 사람을 죽였는데 유영철이 죽였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말을 했다. 그 사건은 유영철이 현장 검증까지 마친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정남규가 자백해서 다시 현장 검증을 했다. 한 사건을 두고 두 사람이 현장 검증을 한 거다. 결국 정남규의 범행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남규에 대해 “자신이 유영철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있었다. 범행 수법에서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며 “정남규가 실제로 유영철보다 더 많이, 더 완벽하게 죽이고 싶었고, 살인에 있어서는 ‘1인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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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년의 시신은 범행 16일 만인 2004년 1월 30일이 돼서야 발견됐다. 정 씨는 첫 살인을 한 뒤 거침없이 범행을 이어갔다. 같은 해 1월 30일 서울 구로구에서 4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중상을 입혔고, 2월 6일 이문동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이후 정 씨는 2004년 1월부터 약 27개월 동안 서울과 경기 지역을 돌며 흉기로 피해자들을 난자했다. 특히 그는 상대적으로 신체 힘이 약한 여성과 중년 남성만을 범행 목표로 잡았다.
그는 2006년 4월 22일 검거 당시 금품을 훔치기 위해 침입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한 다세대주택에서 20대 남성이 자고 있자, 그를 먼저 처리하기 위해 둔기로 내려쳤다. 하지만 피해자는 부상만 입은 채 잠에서 깼고, 그는 정남규와 격투를 벌여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를 제압했다. 이렇게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그는 총 14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특히 그는 원한 관계나 금품 갈취 등이 목적이 아니라 살인 자체를 즐겼기 때문에 검거 후 수사 과정에서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정 씨는 살인을 벌이며 쾌락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경찰이 여러 사건에 대해 질문할 때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마치 자신은 당당하다는 듯 답변했다.
이 과정에서 정 씨는 “지금도 피 냄새를 맡고 싶다. 사람 피에서는 향기가 난다”, “(경찰에 잡혀) 더 이상 살인을 못 할까 조바심이 난다” 등 살인 행위에 집착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69년 전북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정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다. 시골 농가의 5남 4녀 중 일곱째인 그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정상적이지 못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심지어 정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정남규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해당 사건이 자신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시인했다.
이후 정 씨는 약 1년의 재판 끝에 그는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정 씨는 재판 과정에서 갑자기 검사석으로 돌진하거나 판사를 향해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고 외치는 등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사형수가 된 정 씨는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생활했다. 그는 수감 중에도 살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살인을 일삼은 정 씨는 결국 구치소에서도 살인을 저질렀다. 2009년 11월 21일 정 씨는 독방에서 목을 매 스스로를 죽였다. 희대의 악마 정남규의 마지막 살인이었다.
교도관들은 극단적 선택을 한 정남규를 발견해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정 씨는 다음날 새벽 사망했다. 정남규의 빈소에는 오직 그의 매형만이 찾아왔고, 유가족의 외면 속 그의 시신은 화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