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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관례대로 조종사들은 영어로 항공기의 위치와 고도를 밝혔고 평양관제소 직원들도 영어로 답했다. 하지만 우리 측에서 먼저 한국어로 교신하자고 제안했고 북측은 “여러분의 우리 관제 지역 통과를 환영합니다. 여러분을 환영하듯 평양의 날씨는 미누스(영어 ‘마이너스’의 러시아식 발음) 1도로 맑고 좋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짧지만 한민족의 고유 언어인 한국어로 대화하며 남과 북이 동포애를 나눈 순간이었다. 국제 관례는 영어로 교신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자국에서는 편의상 자국어로 교신할 수 있다는 규정을 활용한 조치였다.
이날의 비행은 남북한이 같은 해 4월 23일부터 상호 FIR을 개방키로 한 것과 관련해 통과 항로에 대한 미비점을 사전에 보완하기 위한 시험 비행이었다. 앞서 남북 당국은 1997년 10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항로회의에서 1998년 4월 23일부터 대구의 항로관제소(ARTCC·Air Route Traffic Control Center)와 평양의 비행정보구역(FIR) 통과 국제 항로 개설을 위한 남북 관제 협정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상호 영공을 개방키로 합의하고 같은 해 11월 19일 양측 간 직통 전화를 개설했다. 1998년 2월 17알엔 인공위성을 이용한 예비 회선도 개통했다.
국적기의 북한 영공 통과는 6.25 전쟁 당시 군용기의 비행 이후 이날이 처음이었다. 대한항공 화물기는 북측의 “다음에 계속 만납시다”라는 인사를 뒤로하고 평양 FIR을 빠져나왔다. 북한 상공 300km를 20여 분 간 비행한 뒤였다. 이어 3일 오전 10시 25분 김포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날 대한항공 화물기의 북한 영공 통과 순간, 당시 우리나라의 FIR을 관할하던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대구항공교통관제소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20여 분의 북한 영공 비행을 마치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날 국적기의 북한 영공 통과는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이라는 정치적 성과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녔다. 당시 우리나라와 북미 간 항공 노선은 김포~강릉을 거쳐 일본 서쪽 끝인 미호~니가타를 통과했다. 하지만 북한 영공이 개방되면서 서울~강릉을 지나 일본을 우회하지 않고 동해상에서 북한 FIR 300㎞를 거쳐 곧바로 러시아 캄차카반도 방향으로 올라감으로써 비행 시간을 50여 분 단축할 수 있게 됐다. 또 우리나라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로도 일본 서쪽을 경유하지 않고 서울~강릉에서 동해로 빠져나와 북한 FIR을 지나 곧장 비행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건교부는 북한 영공 개방과 러시아 캄차카 항로의 무제한 이용권 확보로 우리나라와 미주 및 러시아 간 운항 시간이 20~50분 단축돼 연간 2000만 달러의 유류비를 절감하게 되고 북한도 200만 달러 이상의 관제료 수입을 올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 영공은 예정대로 같은 해 4월 23일부터 본격 개방됐다. 하지만 북한 공역은 지난 2009년 남북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며 다시 닫히게 된다.
북한은 2009년 3월 5일, 우리나라와 미국의 한반도 전시 상황 대비 합동 군사 훈련인 ‘키 리졸브(Key Resolve)’ 훈련을 문제삼으며 “군사 연습 기간 동안 우리 측 영공과 그 주변, 특히 우리의 동해상 영공 주변을 통과하는 남조선 민용 항공기의 항공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선포했다. 당시 키 리졸브 훈련은 3월 9일부터 20일까지 실시됐는데 이때부터 우리나라 국적 항공기들은 스스로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북한 항로를 피해 운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다음해인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이 터지고, 우리 정부가 ‘5.24 대북 제재 조치’를 발표하면서 우리 국적기는 북한 영공을 통과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