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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다소 식상한 별칭이긴 하지만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소설 ‘아Q정전’의 작가, 루쉰(魯迅·1881∼1936)이다. 어마어마한 명성에 비해 소설은 별거 없다. 청나라 말기에 태어난 아큐란 평범한 사람이 가난하게 살다가 억울하게 총살당한다는, 한마디로 속 터지는 이야기다. 더 답답한 건 아큐의 정신상태다. 깡패한테 얻어맞으면서도 “아들뻘과 싸워서 무엇하리. 아들에게 맞은 셈 치자”라면서 자기합리화를 한다.
여기서 잠깐. 작가가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을 부르짖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크게 오해한 거다. 루쉰의 진짜 의도는 현실을 직시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데 있다. 청나라 말, 나라가 망해가도 중화사상에 취해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중국인을 향한 쓴소리다. 크게 재미는 없어도, 뼈는 제대로 때리는 이야기다. 이렇게 예술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사고를 계몽하고 나아가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 루쉰이 평생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루쉰이 발표한 문학작품은 그 수준이 들쑥날쑥하고, 창작보다는 번역이 더 많다. 그래서 문학계에서는 과연 루쉰을 진짜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 오히려 루쉰의 업적에서 이견이 없는 분야는 미술, 특히 목판화다. 루쉰은 생의 후반기인 1920∼1930년대 목판화의 수집과 전파에 진심을 다했고, 당대와 후대 모두에 미친 영향이 실로 지대해 ‘아버지’란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
◇빠르고 경제적인 목판화에 강한 인상…많은 사람 계몽에 제격
루쉰이 미술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다. 10대 무렵에 가세가 기울었기에 예술에 몰두할 여유 따위는 갖지 못했다. 문예에 눈을 뜬 것은 어쩌다 국비 장학생이 돼 일본으로 떠났던 1902년 무렵부터였다. 원래는 서양의학을 배우려 했다. 청나라에 필요한 것은 서양의 현대의학이라 믿어서였다. 아픈 아버지가 한의학으로 치료받다 돌아가셨던 경험도 양의학에 기대를 걸게 했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 그는 서양의학이 아닌, 예술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중국이 낙후한 것은 몸이 병들어서가 아니라 정신이 병들었기 때문이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썩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이나 의학이 아닌, 문학과 예술이다. 이때부터 그는 문예에 평생을 바쳤다.
특별히 목판화에 열정을 불태운 것은 1927년 상하이에 정착하면서다. 그 무렵 상하이는 청나라의 최대 항구로 유럽의 미술을 실시간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많고 많은 장르 중에 유럽의 목판화가 루쉰을 매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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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목판화였을까. 루쉰은 “재미있기 때문에, 간편하기 때문에, 유용하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판화가 뭐가 재미있느냐고. 우선 목판화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만들어왔던 장르였기에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았다. 동시에 외국 판화들은 새롭고 이국적이었다. 친숙하면서도 신선한 목판화에 루쉰은 재미를 느꼈다. 게다가 판화는 루쉰의 말 그대로 간편하고 유용하다. 판 하나만 만들면 판이 닳을 때까지 몇 장이고 찍어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기 쉽다. 유화를 한장 한장 제작해 배포하는 것보다 빠르고 경제적이다. 요즘 말로 ‘가성비 갑’이라고 할까. 더구나 목판은 강한 색채 대비와 날카로운 칼자국 때문에 강한 인상을 준다. 많은 사람에게 강렬하게 다가갈 수 있는 목판화는 예술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싶었던 루쉰에게 매력적인 매체가 아닐 수 없었다.
직접 목판화를 만들진 않았다. 창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루쉰은 일찍이 알았던 것 같다. 대신 수집가, 전시기획자, 출판인, 교육가로 헌신했다. 일찍부터 루쉰은 마음에 드는 목판화를 한두 점씩 모으기 시작했고, 컬렉션이 꽤 볼만해지자 젊은 미술가들에게 보일 기회를 부지런히 만들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집중적으로 네덜란드, 헝가리, 아랍 등의 나라를 포함하는 목판화 전시를 꾸준히 열었다. 그 중 ‘독일, 러시아, 프랑스 목판화 전시’는 이틀 만에 400명이 방문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는 결코 자기 컬렉션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좋은 작품이라 여겼던 것이 제일 컸고, 욕심을 보태자면 중국에서도 목판화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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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목적에서 목판화 화집도 여러 권 출간했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작품집은 그가 말년에 선보인 야심작이었다. 콜비츠는 의사였던 남편과 함께 빈민가의 병자들을 치료하고, 자선병원을 세워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그들의 삶을 작품으로 남겼던 미술가다. 1차대전에서는 아들을, 2차대전에서는 손주를 잃으며 말년에 판화를 통해 반전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가난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고, 일본과 전쟁, 또 연이은 내전(국민당 대 공산당)의 시대를 살던 루쉰에게 콜비츠의 작품은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콜비츠의 작품 저변에 깔린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망도, 작품을 통해 그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표도 루쉰과 동일했다. 그렇기에 루쉰은 1930년부터 꾸준히 콜비츠의 작품을 수집하고, 보다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화집까지 출간했던 거다.
나아가 루쉰은 판화 실습회와 강연도 열었다. 실기수업을 했고, 판화의 역사에 대한 강의도 직접 했다. 요즘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연계 프로그램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겠다.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 미술가들은 사회변혁의 메시지를 담은 목판화를 중국 전역과 후대에 전달하는 충실한 매개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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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진정한 유산은 ‘예술에 대한 깊은 믿음’
컬렉션을 활용해 전시를 꾸리고, 화집을 만들고, 교육 프로그램의 기획과 진행까지! 현대의 미술관에서나 하는 방대한 일을 루쉰은 사명감을 갖고 개인적으로 진행했다. 예술을 대할 때, 루쉰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루쉰이 주목하는 것은 한결같이 사회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작품이었다. 색채의 조화나 형태의 아름다움을 실험하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상하이폭격 등과 같은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던 만큼, 루쉰은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작품에 깊이 공감했다. 또한 그런 작품이야말로 사람들을 계몽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식의 작품은 평가가 갈린다. 때로는 보기에 불편할 수도 있다. 예술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고, 미감이 맞지 않아 고개를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취향과 관계없이 꼭 봤으면 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루쉰의 믿음이다. 루쉰은 언제나 예술에는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힘이 있다고 믿었고 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꾸자고 독려했다. 예술작품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가닿아 그 누구도 아큐처럼 루저로 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루쉰의 유산은 유명해진 문학작품 하나, 관람객이 많이 왔던 전시 하나, 고퀄리티의 화집 하나에 있지 않다. 그의 진정한 유산은 그 모두를 엮는 키워드 ‘예술에 대한 깊은 믿음’, 거기에 있다.
상하이에는 루쉰기념관이 있다. 언젠가 상하이에 가게 된다면 꼭 한번 방문을 권한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