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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의 당부와 에글렌타인 젭의 호소[이희용의 세계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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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기자I 2026.04.27 05:00:00

이희용 언론인·이데일리 다문화동포 자문위원 기고
어린이날 산파역 방정환·세이브더칠드런의 에글렌타인
놀 공간 있어도 놀 시간 부족, 재난 닥치면 아동 먼저 구조
어린이 인권운동가 말 명심을

[이희용 언론인·이데일리 다문화동포 자문위원] 오는 5월 5일은 제104회 어린이날이다. 40여 개 소년단체 대표 등으로 구성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1923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어린이날 기념식을 개최한 것을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천도교소년회는 한 해 앞서 같은 날 어린이날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은 천도교소년회의 창립 1주년 기념일로 새싹이 돋아나는 5월의 첫날이란 의미도 담겨 있다.

조선소년운동협회는 기념식에서 ‘소년운동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골자는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해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해 만 14세 이하에게 유무상 노동을 폐하게 하라 △배우고 놀기에 족할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세 가지였다.

어린이 선언을 주도한 방정환(왼쪽) 선생과 아동권리선언을 기초한 에글렌타인 젭 여사.(사진=국가보훈부, 세이브더칠드런)
일본에 있던 방정환은 천도교소년회와 조선소년운동협회 창립부터 어린이날 제정과 선언문 발표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1923년 서울에서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리던 날 도쿄에서는 그의 주도로 색동회가 창립됐다.

색동회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주시오”,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등 어른과 어린이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1919년 영국의 사회운동가 에글렌타인 젭은 1차 대전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굶주린 아이들을 돕자는 내용의 전단을 돌리다가 이적행위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뒤 세계 최초의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을 창립했다. 그는 1923년 △정상적 발달을 위한 지원 △재난 상황에서 최우선 보호 △모든 형태의 착취에서 보호 등 5개항을 담은 아동권리선언 초안을 마련했다.

국제연맹은 이듬해 9월 24일 이를 토대로 한 ‘제네바 선언’을 채택했다. 유엔은 1959년 아동권리선언을 10개항으로 확대한 데 이어 1989년 11월 20일 지금까지 가장 많은 나라(196개국)가 가입한 유엔국제아동협약을 통과시켰다.

인권 의식이 뒤떨어지고 근대적 법률 체계를 못 갖춘 일제강점기 한국이 선진국들보다 먼저 최초의 어린이 인권 선언문을 발표하고 1920년 튀르키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린이날 제정의 산파역인 방정환은 어린 시절 천도교 계열 소년입지회에 몸담았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민족운동과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가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셋째딸과 결혼한 뒤 보성정문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가 어린이 인권과 평등사상에 일찍 눈을 뜬 것은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천도교 인본주의 정신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27년부터는 노동절과 겹치는 것을 피하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일요일로 바꿨다. 소년운동단체들이 민족주의·사회주의 진영으로 분열된 가운데 1931년 7월 23일 방정환이 별세해 소년운동도 침체의 늪에 빠졌다. 1937년부터는 일제가 어린이날 행사마저 금지했다.

1946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서울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이때부터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고정됐다.(사진=국가기록원)
1945년 8월 해방을 맞자 어린이날도 부활했다. 첫 기념식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주최로 예년처럼 1946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열었는데 그날이 5일이었다. 해마다 날짜가 달라지는 불편을 막기 위해 이날을 어린이날로 정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제정 당시의 5월 1일로 돌아가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노동절과 겹친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올해로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정한 지 80년 됐다.

오늘날 한국의 어린이들을 100여 년 전 어린이들과 견줘보면 먹고 입고 자는 것은 크게 풍족해졌다. 부모의 폭력과 노동 착취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범죄와 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고 과열 경쟁 속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방정환이 당부했던 ‘놀 공간’은 있으되 ‘놀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재난이 닥치면 아동을 가장 먼저 구해야 한다”는 에글렌타인 젭의 호소가 무색하다. 국내 개봉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힌드의 목소리’에서 생생히 목격하는 것처럼 전후방 경계가 희미해지는 현대전의 특성 탓에 최근 전쟁일수록 어린이 희생자가 많다. 지난달에는 미군이 이란 초등학교에 미사일을 쏴 수업을 받던 학생 170여 명이 숨졌다.

어린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꿈을 꿀 자유가 있다. 그런 세상을 당장 만들기는 어렵더라도 1년 중 하루만큼은 그런 희망을 안겨주자고 다짐하는 날이 어린이날이다. 세상에는 불행한 아이, 꿈조차 사치스럽게 여기는 아이, 미처 꿈도 꿔보지 못한 채 일찍 생을 마감하는 아이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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