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3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로 그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리던 당시 문재인 변호사는 침통한 심정을 억누른 채 차분한 어조로 이 같이 ‘노무현 서거’ 소식을 발표했다. 주요 일간지들은 서둘러 호외를 찍어 서울 도심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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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마을 주민을 만나 마늘 작황에 대한 주제로 짧게 담소를 나누기도 한 노 전 대통령은 오전 6시 10분께 봉화산 부엉이바위에 도착한다. 잠시 후 6시 14분께 경호원 이 씨에게 “정토원에 가서 선법사가 있는지 확인하고 오라”고 지시한다. 약 3분 후 돌아온 이 씨는 노 전 대통령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을 찾기 위해 근처 등산로 등을 수색하던 이 씨는 6시 51분께 부엉이바위 아래 쓰러져 있는 노 전 대통령을 발견한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이날 오전 9시 30분 사망 판정을 받는다.
그는 열다섯 줄짜리 짧은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는 등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풍운아 노무현’,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던 그는 이렇게 향년 6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그가 투신을 선택한 표면적 원인은 검찰 수사로 인한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는 2009년 정관계 로비 사건인 ‘박연차 게이트’로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본인도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심적으로 크게 위축됐다. 이런 와중에 ‘논두렁 시계’ 등 망신 주기 식 보도까지 나오자 그의 입장에서는 심한 모욕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결국 이 보도가 나오고 10일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피의자인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당시 검찰은 “수사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해 안타깝고 애통하게 생각한다”면서도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 수사 기록은 영구히 보존되고 추후 역사적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 둬야 한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는데 전국에 총 335곳(지방자치단체 운영 102개, 민간 운영 233개)의 분향소가 설치됐고 국민장 장의위원회 추산 약 500만 명의 조문객이 분향소를 찾았다.
그의 사망은 큰 후폭풍을 몰고 왔다. 여당 일각에서조차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이 나왔을 정도로 당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은 악화됐다.
반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친노 세력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노 전 대통령 사망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에 뜻이 없었던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 국민장 이후 정계에 입문해 결국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유시민 작가는 문재인 전 대통령 취임 직후 방송된 한 종합편성채널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현실 정치에서 사실상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복권이 이뤄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2009년 8월 18일에 폐렴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