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영끌’까지 동원된 고려아연 지분 전쟁[김성진의 인더백]

김성진 기자I 2023.03.05 08:00:00

74년 동업 두 가문간 지분 전쟁
경영 맡아온 최家, 지분 매집 불씨
장家 지분 32.4%..격차 4%p 줄어
한 쪽 포기 않는 한 장기전 갈 듯

※김성진의 인더백은 ‘인더스트리(industry)’와 ‘백(back)’의 합성어로 산업의 뒷얘기를 다루는 코너입니다. 대형 사업·재무 이벤트뿐 아니라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공시 등을 짚어내 다양한 시각에서 산업과 기업의 생로병사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데일리 김성진 기자] “이제 큰 돈 나올 데는 없는 것 같은데요.”

74년 간 동업관계를 이어왔던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 집안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집안 간 고려아연 ‘지분 매입 경쟁’을 놓고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가 한 말이다. 그동안 소유권 없이 경영을 맡아왔던 최씨 집안이 지난해부터 지분 매집에 나서면서 급기야 최근에는 종중 자금까지 동원했다. 종중은 선조를 공동으로 하는 후손들의 상호 친목단체로, 사실상 고려아연 지분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조상님 영혼까지 끌어다 쓴 셈이다.

세계 1위 아연 제련 업체인 고려아연은 지난 1949년에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함께 세운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다. 그룹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캐시카우로서 그동안 소유는 장씨 일가, 경영은 최씨 일가가 도맡아 동업을 이어왔다. 그러나 지난해 창업주 3세 최윤범 회장이 취임한 이후 두 집안 간 기류가 달라졌다. 고려아연이 그룹에서 계열 분리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지분 확보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현재 고려아연의 최대 주주는 장형진 영풍 고문과 ㈜영풍 등 영풍그룹이다. 하지만 최씨 일가가 지난해 한화, LG, 한국타이어 등을 우호세력으로 섭외해 지배력을 확 늘린 이후 두 집안간 지분율 격차는 4%포인트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더 이상 새로운 자금처가 나타가 판을 뒤흔들지 않는 이상 지루한 지분 경쟁이 이어지며 장기전으로 흐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74년 동맹 깨졌다..두 가문 지분매입 경쟁

5일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현재 최윤범 회장 측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은 28.53%로 집계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해주최씨 준극경수기호종중’이 고려아연 주식 3만3905주를 매입해 지분율을 기존 0.27%에서 0.44%로 늘린 데 따른 결과다. 종중은 이번 지분 매입을 위해 201억원의 자금을 투입했다. 여기에 최씨 가문이 경영하는 유미개발 역시 지난달 20일부터 24일까지 장내에서 총 10만1720주(0.51%)를 605억원에 매집해 힘을 보탰다.

장씨 가문도 계열사인 에이치씨유를 동원해 지분 매입에 나섰다. 공시에 따르면 장씨 가문이 운영하는 에이치씨유는 140억원을 투입해 고려아연 지분 11만6115주(0.04%)를 사들였다. 장씨 가문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은 32.42%로 두 가문의 지분율 차이는 4% 포인트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분 매입 경쟁은 지난해 8월 최씨 가문의 우호세력으로 평가받는 한화그룹이 고려아연 지분 5%를 매입하면서 서막이 올랐다. 이후 고려아연은 보유하던 자사주 6.02%를 LG화학, ㈜한화 등과 교환해 백기사로 섭외했다. 또 트라피구라, 모건스탠리, 한국투자증권에게 자사주를 넘기고 투자금을 유치했다. 이로 인해 10%포인트 이상 차이나던 두 가문의 지분율 차이는 현재 4%포인트 수준으로 빠르게 좁혀진 것이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사진=고려아연.)
◇17일 이사회 결과 따라 경영 주도권 갈릴 듯

두 가문의 지분 격차가 줄어들며 업계 관심은 오는 17일 열릴 예정인 고려아연 주총에 쏠리고 있다. 이사회 인원 11명 중 6명이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사회에서 어느 가문 쪽의 인물이 선임되느냐에 따라 향후 경영 주도권 향방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최씨 가문 쪽에 무게추가 기울고 있다. 이사 후보에 올라 있는 인물들 중 박기덕 고려아연 사장, 박기원 온산제련소장, 최내현 켐코 대표 등 최씨 가문 인물이 최소 절반을 차지한다.

다만 이번 주총 결과와는 관계없이 이미 장기전의 조건은 다 갖춰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장씨와 최씨 가문의 지분율은 각각 32.4%, 28.3%로 사실상 누구 하나 확실한 주도권을 쥐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 가문 모두 이사회를 앞두고 지분 매입에 총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다른 한 쪽을 압도할 정도의 자금력을 동원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번 주총에서 최씨 가문이 자신들 인물을 대거 진입시킨다 하더라도 장씨 가문은 높은 지분율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이사회 진입을 시도할 수 있다. 계열분리도 장씨 가문이 반대한다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계열분리를 위해서는 장씨 가문의 지분이 3% 미만이고, 임원의 겸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씨 가문이 지분만 유지한다면 경영권 싸움은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행동주의 펀드 KCGI와 한진그룹 간 경영권 분쟁 역시 산업은행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평가 받는다. 게다가 캐스팅 보트인 국민연금이 두 가문의 집안 싸움에 과연 얼마나 주도적으로 참여할지 여부도 미지수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 현 상태로 보자면 두 가문 중 누구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며 “서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빠른 시일 안에 사태가 마무리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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