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퍼레이드’는 1989년 동독에서 동독 출신 DJ 닥터 모테(DR. Motte)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150명의 사람이 모여 파티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매년 7월 첫째 주 토요일에 열려왔다. 해당 축제는 매해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등 대표적 유럽 테크노 축제로 자리잡으면서 단 하루에만 2000만 유로(한화로 약 286억)의 수익금이 발생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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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행사가 열리는 장소였다. 과거 화물 열차역이었던 폐역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큰 건물 2개와 몇몇 터널로 이뤄진 곳으로, 약 3만평의 부지였으나 140만 명의 사람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주최 측은 공연장 내부에는 20만 명만 수용하기로 하고 공연장 외부에는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사람이 나갈 수 없도록 울타리를 쳐서 관리했다.
그런데 공연장으로 오고 가는 길에는 메인 출입구와 이곳을 관통하는 터널, 작은 출입구 하나가 있었다. 출입구로 사용되는 메인 출입구와 작은 출입구 둘 다 출구와 입구가 정확히 나뉘지 않아 지나는 사람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었고 출입구쪽은 경사가 있어 공연장보다 지대가 낮았다. 이는 압사 사고로 이어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많은 인파가 몰린 가운데 11시에 오픈하기로 했던 공연장은 정오가 돼서야 공개됐다. 오후 2시경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DJ의 공연에 맞춰 춤과 노래를 즐기며 DJ들이 탄 개조된 트럭의 뒤로 퍼레이드가 이어졌고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트럭의 이동도 느려졌다. 2시 42분쯤에는 공연장과 입구는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3시 30분쯤 관계자들은 경찰에 협조 요청을 구했다. 경찰은 메인 출입구에 몰린 사람들을 앞으로 보내 최대한 분산시키려 했으며 사람들이 메인 출입구로 몰려들지 않도록 공연장에서 나오는 다른 길목을 모두 막았다. 하지만 인파가 점점 몰리자 어느덧 경찰의 저지선은 터널에서 밀려났다.
4시 6분쯤 터널엔 메인 출입구로 들어가려는 사람과 나가려는 사람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저지선 마저 무너지자 좁은 공간으로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와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찰은 확성기로 더는 사람을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했으나 소용없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일부 사람들은 직원용 자동차 위에까지 올라가며 위험을 피했고, 일부는 비상용 사다리, 터널에 붙은 간판 위로까지 대피했다. 통로에 있던 계단 난간은 이미 인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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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발생 14분 후 메인 출입구에서 사람들이 물러나며 사태는 진정되는 듯 보였다. 드디어 터널로 진입한 구조대는 의식을 잃은 사람들의 응급 처지를 시도했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흘리고 간 신발, 선글라스 등 집기들이 자리를 잃고 나뒹굴었다. 긴급 치료를 받는 부상자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이로써 총 21명이 사망하고 650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중에는 뼈가 부러지거나 관절에 큰 충격을 받아 장애를 입은 이들도 있었으며 이를 목격하면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이 사고로 러브 퍼레이드는 영원히 사라졌다.
사고 후 공연 주최 측과 경찰, 뒤스부르크 시장이 법정에 섰다. 이 과정에서 2009년 10월경 시장에게 “러브 퍼레이드가 열릴 장소는 사람 수백만 명이 모이기에 공간이 충분치 않다”는 담긴 공문이 도착한 바 있었으나 이를 무시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2012년 2월 시장은 탄핵당했으나 10년간 재판이 지속됐음에도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고, 막바지에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식어갔다.
‘러브 퍼레이드’ 압사 사고는 좁은 출입구와 출입구 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경사 등 이태원 압사 사고와 비슷한 사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렇게 행사의 명맥이 끊긴 줄 알았던 2022년 8월, ‘러브 퍼레이드’의 정신을 이어받은 ‘레이브 더 플래닛’(Rave the planet)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행사가 열렸다.
20만 명 가량이 참여한 이 행사에는 경찰 600여 명이 투입돼 차량을 통제했다. 행렬 뒤에는 경찰차와 청소 차량이 대열을 이뤄 따라왔고 쓰레기를 즉각 수거하는 등 기존의 문제를 차단하는 모습으로 참사의 상흔을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