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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판이 벌어졌다. 물처럼 모나지 않다. 그 흐름에 몸을 내맡기면서 구부정해진다. 엉덩이도 살작 빠져 얼핏 춤이 아니라 엉거주춤 같지만 절묘하게 춤사위가 이어진다. 어디로든 뻗을 수 있게 휘어졌다가, 여차하는 순간 들이 댓바람으로 펼쳐낸다.
하용부는 가만히 서 있어도 춤이 된다는 ‘전설의 명무’ 하보경(1906~1998)의 손자다. 하보경은 영남 양반춤의 대가다. 하용부의 증조할아버지(하성옥)로부터 내려오는 ‘밀양 강변춤’의 맥을 잇고 있다. 타고난 춤꾼이라는 게다. 지난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경남 밀양 백중놀이는 벼농사를 주로 하는 지방의 ‘호미씻이 놀이’의 일종이다. 밀양에서는 백중날에 논다해 ‘백중놀이’, 혹은 ‘꼼배기참놀이’라고도 한다. 양반들은 음력 7월 보름을 ‘머슴날’로 정해 머슴들에게 휴가를 주고 ‘꼼배기참’이라고 하는 음식으로 머슴들을 달랬다. 이날 머슴들은 각종 춤과 토속적인 놀이를 벌이며 하루를 즐겼다. 놀이는 농신제(農神祭)를 시작으로 작두말타기, 춤판, 뒷놀이로 이어진다. 농신제는 농악을 하며 원을 지어서 오방진굿으로 놀이마당을 닦는 순서다. 작두말타기는 지게와 비슷한 작두말에 좌상·무상을 태우고 벌이는 양반 욕하기 놀이이다. 춤판은 양반춤부터 난쟁이, 중풍장이, 배불뚝이, 꼬부랑할미, 떨떨이, 문둥이, 꼽추, 히줄대기, 봉사, 절름발이 등 익살스러운 춤과 범부춤, 오북춤 등 밀양에서만 볼 수 있는 멋드러진 춤으로 흥취를 돋군다. 이들 춤들은 각기 개성 있고 향토색이 짙다. 마지막 뒷놀이는 모든 놀이꾼이 함께 어울리는 군무로, 다양한 장단에 저마다의 활달한 춤사위로 기진할 때까지 춤을 췄다고 한다.
하용부의 공연은 밀양연극촌(055-355-2308)에성 열린다. 즉흥 춤 공연과 춤사위 배우기 등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거친 숨소리와 나비처럼 떨리는 손짓을 지근거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 춤을 배우는 시간도 흥겹다. 처음에 멀쑥해하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저마다 흥의 세계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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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눈도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음식백과서인 ‘음식디미방’ 책 뒤에 쓰인 말이다. 이 책은 지금부터 약 350년전인 1670년(현종 11년) 동사이사에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가 레시피이기도 하다. 이름 그대로 경상도 양반가의 음식을 담고 있다. 지은이는 서계종가의 1대 종부인 ‘여중군자’ 장계향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쓴 책이다. 음식디미방이란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이란 뜻으로 여기서 ‘디’는 한자 지(知)의 엣말이다. 경상도 양반가의 음식과 저장, 발효식품 등 146가지 요리와 51가지 술을 소개하고 있다. 장계향이 남긴 가문의 비법은 13대손인 조귀분 여사의 손에서 그대로 재현될 수 있는 이유도 ‘음식디미당’ 덕분이다. 조 여사는 종부에서 종부로 300년 넘게 이어져 온 손맛을 식탁 위에 펼쳐 놓는다.
석계종택에서는 ‘음식디미방’ 속 요리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잡과편(떡의 일종) 등 비교적 손쉬운 음식들이 대상이다. 조 여사가 강연자로 나선다. 음식디미방의 레시피대로 만든 한상차림을 맛볼 수도 있다. 물론 값은 녹록하지 않다. 유물전시관과 두들마을의 고택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석계종택 옆으로는 음식디미방 체험관, 음식디미방 교육관과 전시관이 있다. 또 근처에는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와 장계향 예절관, 유물전시관이 있어 두들마을에서 하룻밤 한옥체험을 하며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음식을 맛보거나 직접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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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최소 300번 이상은 불을 때운 셈이지요. 그 300번 중에 마음에 드는 색을 찾는 건 손에 꼽을 정도지요. 무수한 실패를 거듭했어요. 그나마 체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힘들었지만 흑유의 매력 때문에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었지요.”
강원도 홍천의 김시영 작가는 국내에서 드문 흑자(黑磁) 명인이다. 흑유(黑釉) 또는 흑자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서 널리 만들던 검은 도자기다. 흰빛을 즐겼던 조선시대에 맥이 끊겨서 그렇지 고려 때만 해도 청자보다 귀한 대접을 받았다. 철분이 든 약토(유약)를 발라 굽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검은빛이 나온다. 김 작가는 “조선시대에 워낙 흰색을 귀하게 여겼던 탓에 자취를 감췄지만 고려 때만 해도 많이들 썼다”고 했다.
김 작가는 대학 시절 우연히 마주한 흑자에 마음을 뺏겼다. 도예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98년. 그는 당시 경기도 가평에 가마터 ‘가평요’를 차렸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전통 흑자 기술이 전수되고 있는 반면 당시 국내에는 스승으로 삼을 만한 도공이 없었다. 독학 끝에 흑자를 빚는 데 성공했고, 지금까지 국내에선 유일무이한 흑자 도공으로 활동해왔다. 김 작가 작품은 흑자를 청자나 백자보다 더 고급으로 치는 일본에서 인기가 있다. 일본미술구락부가 낸 ‘미술가명감’ 2009년판은 그가 만든 작은 찻잔 하나를 무려 100만엔(약 1000만원)으로 감정했다. 현재 그가 빚는 달항아리 연작은 개당 3000만원을 호가한다.
5년 전인 2012년 홍천강 지류 동막천이 지나는 홍천 모곡리에 새 작업실을 지었다. 이름도 그대로인 가평요를 유지했다. 대지 3300㎡(약 100평)의 널찍한 땅에 흙과 나무로 만든 건물 세 개 동이 들어섰다.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흑자를 만날 수 있는 전시장이다. 흑자를 계승하게 된 사연, 흙과 불의 조화에 따라 사뭇 다른 빛깔로 태어나는 흑자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