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한파 속에서도 여기저기 화려한 조명들로 따뜻함이 가득한 지난해 12월.
심장 이식 코디네이터가 심장 공여자(뇌사자) 발생을 알렸다. 어떤 이에게는 한파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따뜻한 봄일 것이다. 체외 순환기(ECMO)를 한 중증 심부전 환자 김 모님에게는 이 소식이 심장 이식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을 터. 만감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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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심실에 심한 경색이 오고 심근 벽은 매우 얇아져 있던 것이다.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김 선생님은 이미 심한 심근 조직의 괴사를 보이고 있어서인지, 수술을 했음에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계속된 부정맥. 제세동기 삽입 후 겨우 퇴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계속 심부전이 악화 됐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결국 심장 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본원을 방문했다. “그간 고생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김모님 첫인사를 이렇게 대신했다.
환자는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어 보였다. 오래도록 정성을 쏟고 있는 따님과 사위, 배우자도 마찬가지였다. 꼭 잘 되면 좋겠지만 이식이라는 것이 누군가가 돌아가셔야 받을 수 있는 것이고 대기중 사망하시는 분들도 있기에 늘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환자에게는 최선을 다해 드리겠다고 이야기를 드렸다. 김모님과 내 만남은 이제 막 봄이 지고 있던 5월말, 이렇게 이뤄졌다.
환자의 심장 초음파상 좌심실 구혈률이 10%가 채 되지 못했다. 원추형이어야 할 심장은 아주 동그란 구형으로 자리 잡아서 제대로 피를 박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폐부종과 폐고혈압은 점차 심해지고 있었으며, 우심실 부전으로 두 다리도 붓고 소화 불량도 심한 상태였다.
우선 승압제 등 약물로 폐부종과 다리 부종을 잡고, 부정맥 약을 쓰며 심장 이식을 대기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참 애꿎다. 어느덧 6개월. 안타깝게도 김 모님을 뵌 2022년도는 여느 해보다 심장 공여자의 수가 줄어 전국 모든 심장 이식 대기 환자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다른 환자들 같으면 그나마 좌심실 보조장치를 삽입하고 퇴원해 외래진료를 다니며 이식을 기다리겠지만, 환자분은 이미 여러 차례 심장 수술을 받고 회복이 되지도 않은 상태여서 마땅히 퇴원할 방법이 없었다.
승압제로 겨우 버티길 6개월. 환자분은 결국 약물로 통제할 수 없는 심한 심실 부정맥이 발생했다. 즉각 체외순환기(ECMO) 삽입했다. 체외 순환기는 심장의 기능이 떨어져 펌프 능력이 되지 않을 때 심장 대신 산소를 교환해 온몸으로 뿜어주는 펌프 역할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대퇴동맥으로 삽입했을 때 다리의 혈전 혹은 머리에 출혈이나 혈전이 발생하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환자가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돼 심한 불편감과 두려움으로 섬망이 발생하기도 한다. 다리에 삽입시 2주 이상 버티기도 어려운 관계로 심장에 직접 ECMO를 삽입하기도 하는데, 환자분은 이마저도 어려웠다. 이미 한차례 수술을 받은 상태라 흉골 주변의 유착이 심하고, 관상동맥 우회술도 받아 혈관마저 가슴뼈에 부착돼 있었기 때문이다.
환자분의 의지는 강했다. 체외 순환기에 의지하던 김모님은 회진 때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눈물로 의식을 부여잡으며 “걸어 나가고 싶다”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더 긍정적인 이야기를 드리고자 노력하였으나 마음 속으론 어쩔 수 없이 대기하다 사망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체외순환기를 삽입한지 2주를 넘어 3주째. 아무리 환자 의지가 대단해도 다리 혈관은 버티지 못했다. 가까스로 심장에 직접 체외순환기를 삽입했고, 그로부터 또 3주가 지났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에 의지를 뛰어넘는 기간인 6주 동안 체외순환기를 삽입하고 버텼으니, 환자의 체력은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감염에도 취약한 상태. 소중한 심장 공여자가 나타난 때가 바로 이때다. 나뿐만 아니라 병원 내 모든 의료진이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서 공여자가 발생하였고 크리스마스에 주말이 낀 상태라 공여자의 심장 초음파 이미지 영상을 제공하지 않아 공여자가 있는 병원으로 가서 심장 초음파를 직접 보기로 했다. 젊고 뽀얗고 하얀 피부를 가진 공여자. 한 아이의 엄마.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그녀. 이런 공여자의 모습과 공여자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심장 이식을 기다리는 급박한 환자의 상태가 아른거리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정신 차리고 꼭 이 공여자의 심장이 김 모님에게 들어와 다시 뛰기를 정성껏 기도하며 이식을 진행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환자에게 이식한 심장은 크고 활기차게 다시 뛰었다. 출혈이 상당했고, 여러 합병증이 발생했으며 의식회복마저 느렸지만 환자분은 마침내 회복했다. 입원한 지 3개월. 위장 삽관으로 하던 식사는 입으로 할 수 있게 됐고, 두 발로 걸어서 퇴원했다.
“내 인생에 다시금 봄이 올 줄 몰랐습니다. 삶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추운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같이 힘겨운 나날을 보낸 김모님은 하루라도 빨리 병원 밖으로 나가 편하게 숨을 쉬며 가족들과 따뜻한 크리스마스 연말을 보낼 날들만 고대했을 것이다. 환자는 퇴원하면서 병원 밖에 만개한 벚꽃과 개나리, 진달래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몇 번이고 설렘과 새 삶의 행복함, 감사함을 표현했다.
그런 김 모님의 표정에서 심장 공여자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던 삶이었는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환자분처럼 단 하루만이라도 더 숨 쉬고 싶은 의지를 다잡을 수는 없는 것인가. 삶은 정말 소중하다. 용기와 희망, 기대와 같은 밝은 감정은 누구나 어둡고 추운 감정의 골짜기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것을. 추운 겨울, 앙상한 가지에서 절대 나올 것 같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인고 끝에 아름답게 피듯이. 자신을 믿고 기다려 보라 얘기해주고 싶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엔, 하루라도 숨 쉬고 싶은 중증 심부전 환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