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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가 늦은 이유가 가관이었다. 일단은 충주호에 구조선이 없었다. 경비정이 한 척 배치돼 있었지만 구조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소방차는 엉뚱한 길로 잘못 가서 되돌아오느라고 시간이 지체됐다. 불이 나자 충주호를 둘러싼 관광객과 차량이 몰리면서 주변 교통이 마비된 것도 원인이었다.
유람선도 화재에 속수무책이었다. 배는 출항하자마자 곧바로 엔진이 정지했는데, 이때 점검을 하거나 배를 돌렸다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출항을 강행한 배에서 불이 났지만, 안전 메뉴얼이 없었다. 승무원은 승객들을 선실로 대피시켰는데, 나중에 이게 피해를 키운 것으로 조사됐다. 불이 나면 선상으로 나가는 게 상식적인 행동 요령이다.
구명장비 사용법이나 대피 요령이 승객에게 전달될 리 만무했다. 당시 배에는 승객수보다 많은 구명조끼가 배치돼 있었으나 이걸 착용한 승객은 몇몇에 불과했다. 배에서는 안내방송도 없었다. 불행히도 이 배는 정원을 초과했고 승객 명단은 작성하지도 않았다.
당국의 허술한 선박 관리도 한몫했다. 유람선은 그해 7~8월 항만청 선박검사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사고 전날 도청과 군청에서 충주호 안전을 점검했는데 정상이었다. 불과 하루 만에 멀쩡하던 배가 출항하자마자 멈추고 불이 난 것이다. 정부는 불과 1년 전인 1993년 10월10일 서해 훼리호 사건(292명 사망·70명 구조)이 발생하자 선박검사를 강화하리라고 공언했지만,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1994년은 정부가 정한 한국방문의 해가 무색하게 대형 인명사고가 잦았다. 충주호 사건 이외에도 대한항공 활주로 이탈 사고(8월10일·사상자 없으나 비행기 전소), 성수대교 붕괴(10월21일·32명 사망, 17명 부상),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12월7일·12명 사망, 101명 부상)가 잇달았다. 전년에는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가 있었고 이듬해 1995년은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4월28일·101명 사망, 202명 부상)와 삼풍백화점 붕괴(6월29일·502명 사망, 937명 부상, 30명 실종)가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