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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월드컵 3·4위전 묵념 의미..제2연평해전[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I 2023.06.29 00:03:00

2002년 6울29일 3·4위 결정전 당일 이뤄진 북의 연평도 도발
NLL 침범 북한군 몰아내 해군 승전..99년 이은 아군의 연승
장병 6명 전사, 19명 부상 희생..피로써 지켜낸 우리 영해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2002년 6월29일 저녁 8시30분,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터키의 한일월드컵 3·4위 결정전. 양 팀은 경기 시작에 앞서 묵념을 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6만3000여 관중 대부분은 묵념에 주목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거둔 사상 최고의 성적에 온 나라가 도취해 있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 6인.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 상사, 박동혁 병장, 서후원 중사, 황도현 중사.(사진=국립대전현충원)
묵념은 경기가 열리기 수 시간 앞선 당일 오전 10시25분 발생한 사건에서 비롯했다. 서북도서 연평도의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해군 경비정 참수리 357호에 포격을 가한 것이다. 당시 해군은 북한 경비정 2대가 NLL을 침범하자 교전 수칙대로 예상 진행 경로를 차단하는 기동을 펴는 와중에 기습 공격을 받은 것이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호는 곧장 응전을 시작했다. 아군의 지원사격까지 더해진 우리의 공격에 북한군은 교전 25분 만에 퇴각했다. 북한 대형 경비정이 화염에 휩싸여 예인선에 이끌려 갔다. 북한군 30여 명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은 1999년 제1연평해전에 이어 재차 북한의 도발을 막아낸 것이다. 승전에는 피의 희생이 뒤따랐다.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계급은 대위)은 교전을 지시하다가 피격당해 전사했다. 조타장 한상국 상사(당시 중사)와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 조천형 상사(당시 하사), 서후원 중사(당시 하사)이 교전 과정에서 전사했다. 방아쇠를 꽉 쥔 채였다. 의무병 박동혁 수병(상병)은 전투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전사자 6명을 비롯해 1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무차별한 피습을 받은 참수리 357호는 동력을 상실하고 침수되기 시작했다. 해군 장병이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서 배를 살리고자 배수 작업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날 정오 참수리 357호는 서해에 침몰했다. 침몰 53일 만인 8월21일 배가 인양됐다. 실종됐던 한상국 상사가 조타실에서 발견됐다.

국방부는 ‘교전은 정전 협정 위반이고 무력 도발’이라고 북한에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북한은 우발적인 충돌이라고 반응했다. 교전은 북한군이 당시의 패배에 대한 복수전 성격으로 분석됐다. 한일월드컵으로 한국의 위상이 치솟는 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도발이라는 시각도 있다. 교전 직후 여론은 월드컵에 휩쓸려 분산돼 있었다.

정부 대응이 도마에 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이튿날 일본으로 출국했다. 한일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하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위해서였다. 출국하지 않으면 북한 의도를 따르는 것이라서 강행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해군장으로 치른 장례식에 군 수뇌와 정부 관계자, 정치 지도자 대부분은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 평화를 유지하던 정부 기조를 무시하지 못했다. 한상국 상사의 부인은 정부와 여론의 냉대에 실망하고 미국에 이민을 갔다.

연평해전을 계기로 허술한 제도가 틀을 잡았다. 특히 ‘전사’한 군인에게 적정한 보상을 할 근거가 마땅찮았으나 법률을 정비했다.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된 복잡한 교전 수칙은 이후 간소화됐다.

해군은 군함에 전사자 이름을 붙여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윤영하함(2007년 6월)을 시작으로 한상국함·조천형함(2009년 9월), 황도현함·서후원함(2009년 12월), 박동혁함(2010년 7월)이 진수돼 영해를 누비고 있다. 승전은 2015년 영화 연평해전으로 각색됐다.

(사진=국립대전현충원)
제2연평해전 승리를 이끌고 살아 돌아온 박경수 상사는 계속 군에 복무하다가 2010년 3월26일 전사했다. 천안함에서 근무하다가 북의 어뢰 공격에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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