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하윤 미술평론가] 모레면 크리스마스다. 동심이 남아 있다면 산타클로스, 선물, 캐럴 등이 떠오를 테고, 어쩔 수 없는 어른이라면 휴일이나 길 막히는 도로가 먼저 생각날 거다. 혹은 십자가.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생일이니까.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지만, 중국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십자무늬를 그리고 있는 작가가 있다. 바로 딩이(丁乙·60)다. 그는 커다란 캔버스를 다양한 색의 십자무늬로 꽉 채운다. 단순노동에 가까운 과정을 딩이는 40년 가까이 홀로 진행해 왔다.
엄밀히 말해 딩이의 그림은 일상을 묘사하지 않은 ‘추상화’지만 구체적인 모습도 얼핏 스친다. 어찌 보면 눈송이 같기도 하고, 오색실로 엮인 퀼트담요 같기도 하고, 알록달록 전구가 반짝이는 것도 같다.
1962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딩이는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거주한 적이 없지만, 상하이 안팎의 미술관·갤러리에서 크게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했다. 베네치아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시드니비엔날레 등에서 초청한 ‘비엔날레급 작가’기도 하다. 대형 설치와 요란한 미디어 작품이 난무하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케케묵은 추상화로 이만큼 조명받기는 쉽지 않다. 그의 ‘십자’에 무슨 특별한 점이라도 있는 걸까.
십자무늬는 청년시절, 여러 종류의 실험을 거친 뒤 안착시킨 딩이만의 도상이다. 학생 때 상하이공예학교의 도서관에서 25권짜리 ‘유럽 모던아트’ 시리즈 를 발견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인상주의부터 큐비즘까지 담긴 거대한 화집이었다. 당시는 이미 모네가 ‘인상, 해돋이’(1840)를 그린 지 100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지만, 마오쩌둥 시대 내내 금지됐던 서구의 미술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딩이는 그 새로운 미술을 깊고 넓게 탐험했다. 수십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사실적인 서양화’에서 자유로워진 것, 궁극적으로 추상에 다다른 것은 이 시절 그의 충분한 실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청년시절 여러 실험 거친 뒤 안착시킨 도상 ‘십자’
마침내 1980년대 중반 딩이는 드디어 자신이 평생 매진할 십자무늬를 찾았다. 십자를 처음 발견한 이후 그는 이 도상을 떠난 적이 없다. 만날 똑같은 것을 하면 지겹지 않나 싶을 수 있지만, 그 안에선 나름의 변주가 있다. 1985년 무렵 등장했을 때는 꽤 거칠게 마감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는 빨강·노랑·파랑의 배경 위에 인쇄한 것 같은 ‘열십자(十) 무늬’를 규칙적으로 그려 넣었다. 요즘에는 몇 겹의 레이어를 쌓아 올려 한층 복잡한 화면을 내보인다. ‘십자’란 핵심은 유지하면서 표현방식은 조금씩 변형시켜 온 거다.
그렇다면 그토록 줄기차게 내리긋는 ‘십자’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근 40년을 가로·세로로만 그어 온 걸까. 앞서 말했듯이 딩이의 십자무늬는 종교적 도상이 아니다. 허무하겠지만 사실 아무 의미도 없다. 딩이는 그저 가장 단순한 형태를 골라서 그렸을 뿐이다. 그림에서 어떠한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또는 개인적 표식을 없애고, ‘의미 없는 회화’를 만드는 것이 딩이의 목표였다. 쉽게 말해 모든 의미를 증발시키고 싶었다. 의미를 거부하고 싶으니까 제목도 없다. 작품명은 그저 숫자로만 달았을 뿐이다.
세상에 맙소사. 아무 의미도 없는 걸 도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그리는 건가. 딩이가 말하는 것처럼 십자무늬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 ‘의미 없음’에 바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이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그간 중국에서 그림은 지나치게 ‘의미’에 시달렸다. 마오시대에 미술은 이데올로기 그 자체였다. 지도자를 찬양하거나 당의 정책을 홍보해야만 했다. 예술가 고유의 개성이 절대 도드라지면 안 됐고, 미감은 없어도 그만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명분과 의미뿐이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줄곧 그랬다. 딩이 또한 문화대혁명 시기에 태어나 온갖 정치 포스터에 둘러싸여 자랐고, 중학교 때는 그것을 그리기도 했다. 딩이는 여기에 질렸다. 모든 미술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지만, 의미를 강요받는 것, 특히 획일적인 의미를 주입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래서 딩이는 의미 없는 십자를 반복함으로써 의미 강박에 시달리는 미술을 구하고, 예술가에게 얹어진 의미 부여란 무거운 짐을 모두 풀어주고자 했다.
|
게다가 당시 중국에서 추상화를 그렸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마오의 중국에서 추상미술은 철저히 금지했다.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은 인민에게 무익했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마땅히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이어야 했고, 그 내용은 당의 사상이어야만 했다. 당의 사상을 담은 것 같지도 않고, 담았다 해도 인민이 해석할 수 없는 추상미술은 추방 당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거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덩샤오핑 정권은 예술의 허가 범위를 다소 넓혀줬지만. 추상미술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헷갈려했다. ‘이걸 허락해? 말아?’하면서 1980년대 내내 오락가락했다. 괜찮다고 했다가도 갑자기 ‘반정신오염운동’ 같은 걸 실행하면서 추상미술전시를 폐막시키곤 했다. 딩이의 십자추상은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탄생했다. 금지되던 형식이 다시 보이는 것. 그 자체에 의의가 짙다. 새로운 시대, 또는 표현의 자유를 함축한다고나 할까.
◇요란한 작품 넘치는 미술계서 케케묵은 추상화로 조명받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 세대 중국 미술가 중에 추상미술을 한 것도 독특하다. 대개 1990년대에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작품은 중국적인 특징이 전면에 드러나지만, 딩이의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캡션을 가리고 보면 어느 나라 작가가 그렸는지 전혀 모르겠다. ‘중국적’이라 교양 있게 말하지만, 다소 촌스러운 여느 회화작가와는 달리 딩이의 작품은 세련되고 맵시가 있다. ‘이국성’을 무기로 하지 않으면서 세계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점은 딩이의 매우 특별한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딩이의 작품과 같은 추상화를 어렵다고 느낀다. 대체 뭐라 하는지 모르겠고, 그림 앞에서 뭘 느껴야 하는지 답답해한다. 그럴 수 있다. 가령 작품만 보고 어떻게 딩이가 녹여낸 수많은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있겠나. 그러나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 추상미술은 해독해야 하는 고대문자가 아니며 예술에서 꼭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흥미롭지 않은 그림은 그냥 지나치면 된다. 어쩐지 좀 끌리고 궁금할 때, 그것에 대해 아는 자의 ‘설 풀이’를 참고하면 된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천천히.
다만 내 눈에 흥미롭지 않은 그림도, 혹은 어려워 보이는 추상미술도 ‘존중’은 했으면 좋겠다. 마오의 중국을 보라.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했을 때 문화가 얼마나 획일화 되는지를.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구성원에게 돌아간다. 획일적인 문화는 결국 획일적인 생각, 다른 말로 자유를 뺏긴 사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난해해 보이는 그림을 만난다면 ‘내 취향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거니’하면 되는 거다. 쿨하게, 점잖게.
모쪼록 올 크리스마스에는 창가에 맺힌 눈송이를 보며, 포근한 퀼트담요를 덮고, 반짝이는 전구를 보면서 다채로운 색으로 엮인 딩이의 십자회화를 떠올려 봐도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