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 능할 뿐만 아니라 호전적으로 알려진 한 왕에게 붙은 수식어다. 주인공은 바로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다. 1189년 왕위에 오른 그는 1191년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된 해안 요새 아크레 봉쇄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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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는 “하틴 전투 이후 처음으로 이슬람군을 격파함으로써 십자군은 사기가 고양된다”면서 “이 승리를 발판으로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점은 예루살렘 코앞까지 간 리처드가 돌연 부대를 철수시킨다는 데 있다. 최 교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십자군 내에서 전술 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의견이 많다”면서 “아마 리처드의 고민은 현재의 전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는가, 이를 지킬 수 있는가 두 가지였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리처드는 살라딘의 근거지인 이집트를 먼저 공격해 흔든 다음에 예루살렘을 치자는 새로운 전술을 내놓았다. 최 교수는 “바로 앞에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 저만치 있는 이집트를 공격하자는 주장이 먹혀들 리 만무했다”면서 “이와 같은 의견 충돌 끝에 십자군은 예루살렘 공격을 포기한다”고 했다.
결국 리처드와 살라딘은 1192년 ‘자파 평화협정’을 맺는다. 골자는 △예루살렘의 이슬람 관할 인정 △예루살렘 성지 순례자들의 안전 보장 △자파에서 티레까지 해안 주요 도시의 기독교 관할 인정 △3년간 유효 등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의 압도적인 무력에 가려진 실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이 나온다.
최 교수는 “처음으로 힘이 아니라 외교로 십자군의 목적을 달성했다”면서 “리처드가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군주임은 분명하나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을 함락해 수성하기 어렵다고 판단,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때부터 십자군 전쟁은 힘에 기반한 외교전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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