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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탄광과 마찬가지로 함백 역시 ‘산업역군’이라는 허망한 이름을 얻은 광부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간 곳이기도 했다. 함백공업소에서만 각종 재해로 175명이 사망하고 6500명이 부상을 입었다.
79년 사고는 주간 출근을 하던 광부 80여명이 광차에 탑승한 상태에서 다이너마이트 취급을 부주의하게 했다가 발생했다. 사고로 광차에 타고 있던 광부 26명이 즉사했고, 7명은 폭발 여파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이 사고 이후에야 전국 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와 광부들이 함께 광차 탑승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이 강화됐다. 거꾸로 그전까지 광부들이 광차를 타고 갱도를 내려 가는 건 늘 폭발 위험이 동반된 도박 행위나 다름 없었던 셈이다.
이 사고는 대한석탄공사 역사상 가장 큰 화약폭발사고로 기록됐다. 사망자 수 역시 같은해 19월 은성광업소에서 발생한 44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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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 수만 있으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던 그 시절, 너무 많은 사람이 자기 일터에서 죽어야 했다. 지하 작업으로 태생적으로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는 광산은 더욱 희생자들이 많았다. 1952년부터 2018년까지 67년 동안 전국 광산에서 1567명이 숨졌다. 해당 기간 석탄 총생산량은 8884만7000톤이었는데, 5만6000톤 정도의 석탄을 캐는데 광산 노동자 1명의 목숨이 요구된 셈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 일터에서 수단방법을 좀 더 가리게 됐고, 노동자의 죽음에 고용주의 형사책임을 묻는 법도 생긴 시대가 됐다. 광산 사고는 그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친 너무도 뼈아픈 교훈들 중 하나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