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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오늘] "아내와 딸 살아있는 것 보고 출근했다"...31년째 숨은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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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혜 기자I 2026.09.02 0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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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31년 전 오늘, 치과의사 최모(당시 31세)의 남편 외과의사 이모(당시 32세) 씨가 살인 등 혐의로 구속됐다.

이른바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 현장 (사진=tvN '알쓸범잡2' 방송 캡처)
이른바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 현장 (사진=tvN '알쓸범잡2' 방송 캡처)
사건은 그로부터 3개월 전 서울 은평구 한 아파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알려졌다.

1995년 6월 12일 오전 9시 10분께 아파트 경비원 신고로 출동한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한 뒤 현장에서 숨진 이 씨의 부인 최 씨와 한 살 된 딸을 발견했다. 이 씨는 개인 병원을 개원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외출한 상태였다.

경찰은 물이 담긴 욕조에서 발견된 최 씨 모녀에게 목이 졸린 흔적이 나타났고, 안방 옷장에서 불이 난 것으로 보아 타살과 방화가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현관문이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도 없었으며 집 안의 현금과 귀중품 역시 그대로 남아 있는 점에서 남편 이 씨를 용의자로 의심했다.

이 씨가 아내와 딸을 살해한 뒤 범행을 위장하고 시간을 조작하기 위해 최 씨의 옷을 벗기고 딸과 함께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은 욕조에 유기했으며,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오전 7시께 불을 지르고 방문을 닫아 천천히 옮겨붙도록 한 뒤 집을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 씨가 범행 당일 최 씨와 심하게 다퉜고 최 씨의 내연 관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추정했다.

이 씨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으나 경찰은 최 씨 모녀 사망과 화재 발생 추정 시각이 모두 이 씨가 출근 전이었고 범행 동기 등 정황 증거가 뚜렷해 이 씨를 구속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실상 직접적인 물적 증거가 없었다.

경찰이 3개월 가까이 각종 법의학적 지식과 거짓말탐지기, 컴퓨터 화재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등 첨단장비를 총동원해 이끌어낸 정황 증거가 이 씨의 범행 개연성을 높였지만, 사건 초기 결정적인 증거를 놓친 게 문제였다.

최 씨 모녀 발견 당시 시신과 욕조, 물의 온도를 확인하지 않아 사망 시점을 추정할 단서가 없었고 가까운 인물들로 수사 범위를 한정하면서 현장의 범행 도구와 지문, 머리카락 등을 찾는데 소홀했다.

경찰이 이 씨가 범인이라고 본 가장 핵심적인 근거 역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법의학자들이 검안을 통해 산출한 사망 추정 시각이었다.

최 씨 모녀를 살해한 시각이 이 씨가 출근하기 전인 오전 4시 전후이고, 전문가가 추정한 화재 발생 시각도 출근 전인 오전 7시 전후여서 경찰 입장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만약 이 씨 주장대로 ‘아내와 딸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출근했다’면 사건 발생 시각은 오전 7시부터 연기가 처음 발견된 8시 20분 사이인데, 이 경우 과학적 정황 증거와 모순된다며 이 씨의 범행을 자신했다.

반면 이 씨의 변호인은 “이 씨가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것은 경찰 조사 과정”이라며 “그전엔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찰이 아무 증거도 없이 이 씨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여러 정황을 무리하게 꿰맞추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반발했다.

이 씨는 재판에서도 일관되게 공소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의식한 듯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 없지만 특별히 이 사건에 신경을 써 검사와 변호인 측 의견을 충분히 듣겠다”고 밝혔다.

또 “검찰 측 자료 목록을 보면 편견을 가질 우려가 있다”며 양측 신문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때까지 검찰 자료 제출을 연기토록 하는 등 신중을 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한국의 법의학자 3명에게 사건을 의뢰해 모두 최 씨 모녀가 오전 7시 이전에 사망했다는 증언을 얻어냈다.

이에 무게를 둔 1심 재판부는 범행 현장 상황 등을 종합해 피해자들이 6월 11일 오후 11시 30분부터 이튿날 오전 6시 30분 사이 살해된 것으로 판단해 이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실제 사형 집행을 하던 시기여서 형이 확정된다면 사형이 이뤄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이 씨 측은 시간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스위스 법의학자를 증언대에 세워 피해자들이 오전 7시 이후에 사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00여만 원을 들인 화재 재현 실험을 통해 불이 난 시점은 이 씨가 집에 없을 때라고 입증하기도 했다.

이는 항소심 결과가 완전히 뒤집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남아 있다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최 씨가 이 씨와 함께 있던 시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 부검 소견만으론 단정할 수 없고 온도가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는 등 증거가 가진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후 1998년 11월 대법원은 다시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으나 2001년 2월 고등법원의 환송심에 이어 2003년 대법원의 재상고심에서 무죄를 확정하면서 8년간의 법정 다툼이 마무리됐다.

결국 최 씨 모녀를 살해한 범인은 찾지 못했고, 현재까지 미제로 남아 있다.

이 씨에 대한 다른 증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유죄 확정 판결에 가능한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고, 다른 용의자가 특정된다고 하더라도 2010년에 공소 시효가 만료돼 기소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 씨의 무죄를 이끌어낸 김형태 변호사는 지난 2013년 펴낸 비망록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에서 “이게 정말 해피엔드일까? 이제 다 끝났으니 남자는 행복할까? 나는 모르겠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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