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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에 나선 경찰은 가혹행위를 전면 부인했다. 경찰 수사관이 박군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었다. 경찰은 박군 부검 결과 내상과 외상이 발견됐으나 “특별한 치명상은 없었다”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의료진은 경찰 해명과 정반대의 증언을 했다. 경찰은 박군이 의식을 잃자 중앙대병원에 의사를 호출했고, 오연상 의사가 현장에서 박군에게 심폐소생술을 폈다. 자신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박군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고, 진료가 아니라 사체 검안서를 썼다는 게 증언 요지였다. 경찰은 박군을 중앙대병원으로 보내 병사처리하려고 했으나 여의찮자 국립경찰병원으로 이송했다.
고문을 자행하고 이를 숨기려고 한 정권의 포악함에 민심이 들끓었다. 경찰은 입장을 바꾸고 고문 사실을 인정하며 가해 경찰관 2명을 구속했다. 이마저도 축소·은폐된 결과였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가해 경찰관 2명의 고백으로 가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 동아일보 해직기자 이부영씨가 교도관을 통해서 바깥에 소식을 전달한 것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해당 사실을 폭로했다. 언론의 취재와 보도가 잇달았다. 정부는 보도지침으로 언론을 통제해왔지만 통제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이 사건으로 경질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한 혐의로 구속됐다. 고문치사 가담 경찰관 3명도 추가로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관련자를 문책하는 내각을 개편했지만 민주화 열기를 거스르지 못했다. 그러는 새 연세대학생 이한열군이 그해 6월9일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6·10 항쟁 결과로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투표로 뽑는 직선제를 골자로 헌법이 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