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비명을 질렀고, 자전거를 타던 유치원생들과 초등학생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이 일로 어린이 2명이 숨지고 시민 21명 중경상을 입었다. 범인은 직장에서 해고된 일로 사회에 앙심을 품은 20대 시각장애인 김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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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 이런 여의도광장에 김 씨는 차를 몰고 나타나 시속 80km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광장을 지그재그로 달리며 시민을 치던 김 씨는 철제 자전거 공구함을 들이받은 뒤에야 멈추어 섰다.
차량이 멈춰지자 김 씨는 바로 시민들에게 붙잡혔지만 이를 뿌리치고 여중생을 인질로 잡았다. 하지만 다시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김 씨는 당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죽인 사람에게 “미안한 생각 없다”며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죽으려고 했으니까 그냥 무조건 밀어붙였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충북 옥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었고 어머니는 시각 장애가 있었다. 김 씨 역시 선천적 약시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치료받지 못했다.
성인이 된 김 씨는 중국집 배달원, 멍텅구리 배 선원, 공장 직공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시력 때문에 배달 나갔다 집을 못 찾기 일쑤였고 공장에서는 실수도 잦았다. 결국 오래 일하지 못하고 해고됐다.
여러 곳을 전전하던 그는 반복되는 해고에 사회를 향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 양말공장에서 해고된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고 몰래 복사해 놓은 양말 공장 사장의 승용차 열쇠를 가지고 범행을 결심하게 됐다.
범행 후 경찰 조사에서 김 씨는 “이왕 죽을 바에야 세상에 복수하고 죽자는 생각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살인죄로 재판에 넘겨진 김 씨는 1991년 11월 29일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시력장애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많은 사람을 죽음의 동반자로 삼기 위해 눈을 감고 차를 몰아 아무런 원한, 감정이 없는 어린이 2명을 치어 숨지게 하는 등 극도의 인명 경시 의식을 지녀 재범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 사회에서 격리코자 이같이 선고한다”고 밝혔다.
그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지만 모두 기각됐고 1992년 8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후 5년 뒤인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그날은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사형집행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