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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으로 유학갔던 동생이 현지 동료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돼 1975년 강제 소환돼 총살을 당한 것이다. 동생이 죽은 직후 김 씨는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몰려 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다. 동생의 죽음에 더해 연좌제의 부당함까지 겪게 되자 김 씨는 북한을 탈출하기로 마음 먹었고, 이때부터 무려 12년 간 탈북을 준비했다.
그러나 김 씨 일가는 청진항을 출발한 다음날 태풍을 만나 길을 잃은 데다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일본 해상에서 표류하다 1월 20일 일본 후쿠이 외항에 도착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1월 21일 김 씨 일가가 승선한 청진호를 츠루가항으로 예인했다. 이 과정에서 김 씨 일가의 탈북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진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통역 요원으로 하필이면 북한과 가까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동포인 마츠야마를 보내 불법 입국 경위를 조사하면서 가족 간 망명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1월 22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이들의 한국 인도를 공식 요청했음에도, 일본 측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해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1월 28일 김창섭 당시 일본 나고야 총영사가 직접 선박에 탑승해서 김 씨 일가를 만났으나, 김 씨는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 씨는 남쪽 대표단의 설득 끝에 대한민국행을 결심하고 이 같은 결심을 가족들에게도 밀어붙였다. 한일 양국은 2월 3일 대만 정부와의 협의 끝에 단기 체류 형식으로 대만행을 우선 결정했다. 김 씨 가족은 2월 7일 새벽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2월 8일 대한민국 정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 작전을 통해 김 씨 가족을 김포공항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탈출 24일 만에 대한민국 품에 안긴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개인 차원으로 남한에 귀순한 경우는 자주 있었지만, 장모·처남·처제까지 포함된 일가족이 집단으로 탈북해 귀순한 것은 처음이었던 터라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김 씨 가족은 1987년 당시 거액이었던 4억여 원 규모의 탈북 정착금 등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여러 차레 사기를 당하는 등 탈북 이후 삶은 순탄치 않았다.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부모 세대와 달리 탈북 당시 청소년이었던 자녀들은 순조롭게 적응하며 빠르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