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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첩 작전은 광범위하고 장기간 이뤄졌다. 그날부터 작전이 종료한 11월5일까지 49일이 걸렸다. 육군 특전사와 해군 특수전단, 해병대 특수수색대 병력 등 군 정예병력이 총 투입됐다. 공군과 해군이 하늘과 바다에서 포위망을 구축했다. 경찰도 전투경찰과 무장 경관을 투입시켰다. 하루 작전에 투입된 병력이 4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무장공비 이광수씨는 유일하게 생포됐다. 좌초 당일 도망하다가 농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서 체포됐다. 그는 초기 허위 진술로 군의 시선을 돌리고자 했다. 시간을 벌면 동료가 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돌리고 군에 협조를 시작했다. 침투 규모와 목적 등은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작전이 장기화하자 이광수씨는 육성으로 “자수해 같이 살자”고 동료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신문 과정에서 ‘광어회를 먹고 싶다’고 한 진술은 회자된다. 북한에서는 고급 음식이니 남한도 그럴 줄 알았는데, 대중적인 음식인 줄 몰랐다. 사건 이후 전향하고 해군에 특채돼 남한에서 안보 교육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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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작전이 종료하고 공비 주검 24구를 북에 보냈다. 북한은 24명이 자결한 것으로 선전했다. 한국에 포로로 잡히느니 죽음으로서 옥쇄한 것이라는 포장이다. 사실과 다르다. 여하튼 북한이 칭하는 ‘강릉의 자폭영웅들’은 24명이다. 사망자 24명과 생존자 이광씨씨를 포함하면 작전에 투입된 인원은 25명뿐이다. 이씨가 작전 인원은 26명이라고 한 진술과 배치된다. 애초 이씨의 진술이 부정확했는지, 실제로 1명은 북으로 돌아갔는지 등 논란이 일었다. 결국 공비 1명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됐다.
북한은 사건을 부인했다. 초기부터 “훈련 중 좌초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발뺌하고, 나중에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우리가 피해자이므로 보복할 것”이라고 역정을 냈다. 사건 자체의 성격과 북한의 이런 사후 태도는 남한의 보수 진영에 활약의 명분을 제공했다. 당시 PC 통신에는 `이를 남북의 권력자들이 이용할 것`이라는 풍자가 돌았다. `남북한 당국의 자작극`과 같은 과격한 주장을 편 몇몇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