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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용익의 록코노믹스]고어 부인이 불러온 메기 효과

피용익 기자I 2019.06.01 06:06:06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좋은 환경보다 가혹한 환경이 문명을 낳고 인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이론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메기 효과(Catfish Effect)’다. 미꾸라지를 장거리 운송할 때 수족관에 천적인 메기 한 마리를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메기를 피해다니느라 생기를 얻어 죽지 않는 현상을 뜻한다. 회사에서는 인사평가와 같은 자극제가 조직원들의 능력을 끌어올리고, 시장에서는 강력한 브랜드가 나머지 제품의 경쟁력 제고로 이어지곤 한다.

1980년대 미국 록 음악계에도 한 마리의 ‘메기’가 등장했다. 메리 엘리자베스 ‘티퍼’ 고어였다. 그녀는 훗날 미국 부통령을 지낸 정치인 앨 고어의 부인으로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록 음악을 탄압하고 규제하는 PMRC(Parents Music Resource Center)의 설립자로 악명을 떨쳤다.

1985년 티퍼 고어는 당시 11살이던 딸과 함께 프린스의 “Purple Rain” 앨범을 듣다가 수록곡 “Darling Nikki”의 가사를 듣고 충격을 받아 PMRC를 설립했다. 자위행위를 묘사하는 성적인 가사가 담긴 노래를 어린 아이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듣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수전 베이커(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국 재무장관의 부인), 팸 호워(부동산개발업자 레이먼드 호워의 부인), 샐리 네이비어스(존 네이비어스 전 워싱턴시의회 의장의 부인) 등 이른바 ‘워싱턴 부인들’이 동참했다.

PMRC는 단체 설립과 함께 ‘추잡한 곡 15선(Filthy Fifteen)’을 발표했다. 이 리스트에는 주다스 프리스트, 머틀리 크루, AC/DC, 트위스티드 시스터 등 헤비메탈 밴드의 곡은 물론 마돈나, 신디 로퍼 등 대중 가수들의 인기곡이 포함됐다. PMRC 설립의 단초를 제공한 프린스의 노래가 리스트 맨 위에 올랐다.

PMRC는 음반사들이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음반에 자발적으로 ‘Parental Advisory: Explicit Content(부모 권고: 노골적 가사)’ 스티커를 부착함으로써 소비자들이 음반의 내용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퍼 고어는 “음악에 재갈을 물리는 목적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지만, 뮤지션들은 ‘Parental Advisory’ 스티커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보장된 언론·출판의 자유를 규제하는 검열 제도라며 반발했다.

당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상원이 개최한 청문회에서는 ‘워싱턴 부인들’과 뮤지션들이 치열한 언쟁을 벌였다. 청문회에 출석한 헤비메탈 밴드 트위스티드 시스터의 보컬리스트 디 스나이더는 자신들의 곡 “Under the Blade”가 사도마조히즘(SM)에 대한 노래라는 PMRC의 지적에 대해 “이 노래는 임박한 수술에 대한 곡”이라며 “고어 부인의 머릿속에 SM과 본디지와 강간이 있으니까 그렇게 들리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당시 미국은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집권하던 때였다.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기조가 대두됐고, 정치적으로 반공과 안보가 중시됐으며, 사회적으로는 전통과 도덕이 강조되던 때였다. 여론은 뮤지션들보다 PMRC 편으로 기울었다. 결국 RIAA(Recording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전미음반산업협회)는 청문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85년 11월1일 ‘Parental Advisory’ 스티커 도입을 결정했다.

‘Parental Advisory’ 스티커는 주로 폭력이나 섹스를 묘사하는 언어가 포함된 음반에 부착됐지만, 프랭크 자파의 앨범 “Jazz from Hell”은 가사가 없는 연주곡으로만 구성된 음반인데도 이 스티커를 붙여야 했다. 앨범 제목에 ‘지옥’이 들어가고 수록곡 제목 “G-Spot Tornado”의 ‘지스팟’이 여성 성기의 한 부분을 지칭한다는 이유에서였다.

RIAA의 ‘Parental Advisory’ 스티커 부착 결정으로 PMRC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월마트 등 유통업체와 다수의 레코드가게들이 이 스티커가 붙은 음반을 팔지 않기로 했고, 일부 매장에서는 해당 음반을 성인에게만 판매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미성년자들이 유해 콘텐츠가 담긴 음반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의견이 많다. 대니 골드버그 골드VE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인터넷 시대 이전에도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일각에선 ‘금단의 열매 효과’로 인해 스티커 부착 음반이 더 많이 팔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머틀리 크루의 보컬리스트 빈스 니일은 “그 경고 스티커를 붙이면 앨범 판매가 치솟았다”고 말했다.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선 ‘Parental Advisory’ 스티커 부착 음반을 듣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조도 생겼다.

‘Parental Advisory’ 스티커가 음반 매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이 사태 이후 록 음악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거치며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단지 밴드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꼽히는 록 앨범 상당수가 ‘Parental Advisory’ 스티커를 부착한 채 발매됐다. 베트남 전쟁 종료 이후 특별히 ‘저항’할 대상을 찾지 못하던 뮤지션들이 티퍼 고어라는 ‘메기’의 등장으로 인해 생명력을 키운 것은 아닐까.

티퍼 고어
◇ Filthy Fifteen

1. Prince - “Darling Nikki”

2. Sheena Easton - “Sugar Walls“

3. Judas Priest - “Eat Me Alive”

4. Vanity - “Strap on Robbie Baby”

5. Motley Crue - “Bastard”

6. AC/DC - “Let Me Put My Love Into You”

7. Twisted Sister - “We’re Not Gonna Take It”

8. Madonna - “Dress You Up”

9. WASP - “Animal (Fuck Like A Beast)”

10. Def Leppard - “High ‘n Dry”

11. Mercyful Fate - “Into The Coven”

12. Black Sabbath - “Trashed”

13. Mary Jane Girls - “In My House”

14. Venom - “Possessed”

15. Cyndi Lauper - “She-B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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