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울며 겨자 먹기로 매각 카드를 꺼내 드는 영국의 유명 소매업체들의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위와 같다. 지난해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면서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할 여력이 줄어든 가운데 영국 정부가 고용주가 직원에 대해 부담하는 국민연금 기여금 세율을 대폭 올려 잡으면서다. 팬데믹 이후 늘어난 국가 부채와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세수를 확대하는 차원에서 그 부담을 기업에 지게끔 한 것이다. 수십 년째 사업을 영위한 영국의 유명 기업들은 당장 4월부터 재정적 부담이 크게 증가하는 만큼, 어쩔 수 없이 인수·합병(M&A) 시장에 모습을 비추고 있다.

◇ 알바생까지 커버하라는 英…무너지는 소매업체들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영국의 모든 업체(고용주)들은 올해 4월부터 직원들에 대한 국민보험 기여금을 더 많이 납부하게 된다. 국민보험 기여금이란 근로자와 고용주가 납부하는 세금 형태의 사회보장 기여금으로, 영국 정부가 연금과 건강보험, 실업급여, 복지 혜택 등을 재정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고용주는 직원의 급여에 따라 일정 비율을 추가로 부담하고, 근로자는 급여에서 원천징수하는 식으로 납부한다.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은 앞서 지난 2023년 예산안을 통해 고용주가 부담하는 국민보험 기여금 세율을 기존 13.8%에서 15%로 올려 잡았다. 여기에 국민보험 기여금 세율 납부 기준 소득도 기존 9100파운드(약 1725만원)에서 5000파운드(약 948만원)로 낮춰잡았다. 쉽게 말해 기존에는 고용주들이 연 9100파운드 이상을 버는 직원에 대해서만 국민보험 기여금을 냈지만, 그 기준이 5000파운드로 낮아지면서 파트타임 근무자와 아르바이트생까지 커버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영국 정부가 지난해 높인 최저임금으로 저임금 노동자도 쉽게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담이 있는 대로 가중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영국 정부는 앞서 최저임금을 기존 10.42파운드에서 11.44파운드로 9.79% 올려 잡았다. 이는 최근 3년 인상률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실제 지난 2020년 영국 최저임금 인상률은 6.2%, 2021년 2.2%, 2022년에는 6.6%였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높은 소매업체들이 자연스럽게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영국 정부가 스스로 만든 셈이다.
자본시장 한 관계자는 “최저임금이 큰 폭으로 인상된 상황에서 4월부터 인상되는 국민보험 기여금으로 소매업 및 외식업체들의 부담이 커졌다”며 “영국에서 아무리 오랜 전통을 이어온 기업이라도 상속세와 사업세, 늘어난 국민보험 기여금 세율까지 감당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업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수천 명의 인력을 감축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며 “영국 국민이 그 여파를 피부로 느끼게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 “4월 전엔 무조건”…부담 가중에 구조조정·매각카드까지실제 영국의 소매업체들은 ‘4월이 되기 전에 손을 봐야 한다’는 마인드로 구조조정에 나서거나 매각 카드를 꺼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영국판 다이소 ‘파운드랜드’다. 이 회사는 지난 1990년 영국에 설립된 저가형 생활용품 및 식료품 판매 기업으로, 식료품과 생활용품, 전자기기 액세서리, 문구류, 장난감 등을 1파운드에 판매한다. 특히 대부분이 자체 브랜드 상품으로 구성된 다이소와 달리 파운드랜드는 유명 브랜드사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운드랜드 모회사는 국민보험 기여금 세율과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현재 영국의 한 금융컨설팅 업체와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다. 안그래도 저마진 구조를 가진 파운드랜드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돈을 벌기 힘들다고 본 것으로 분석된다.
60년 전통을 갖춘 영국의 주방용품 소매업체 레이크랜드도 매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레이크랜드는 최근 잠재적 인수자를 찾기 위해 매각 자문사를 선임했다.
레이크랜드는 영국 전역에 60개의 오프라인 매장을 두고 있는 중소형 주방용품 소매업체로, 4000개 이상의 주방 및 가정용품을 판매한다. 레이크랜드는 지난 2023년 1억 5300만 파운드의 매출을 내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매출 흐름을 보였으나, 오는 4월부터는 미래 비용이 크게 증가하는 만큼 매각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매출이 유지되더라도 미래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을 견딜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미 매각이 마무리된 곳도 있다. 전자제품을 비롯해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 영국의 디오리지널팩토리샵은 최근 영국 사모펀드운용사 모델라캐피털에 매각됐다. 모델라캐피털은 현재 디오리지널팩토리샵의 오프라인 매장을 폐쇄하고 인력 감축에 나서는 등 구조조정에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