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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개발·보존 딜레마의 해법[민서홍의 도시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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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기자I 2025.12.15 05:30:00

산업화 상징에서 논란거리로…소유자에 희생 강요 안돼
뉴욕식 개발권양도제 도입
보존지엔 적정한 보상 부여, 개발 촉진자와 이익 공유를

[민서홍 건축가]서울 도심이 다시 술렁이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세운4구역 재개발사업의 변경 고시를 통해 기존 최고 높이 70m를 145m까지, 용적률은 약 600%에서 1000%로 대폭 완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종묘~남산’ 축선에 놓인 세운상가 일대는 오랫동안 서울 도시정책의 상징적 실험장이었다. 1960년대 산업화의 상징에서 2000년대 도시 정비의 논쟁지로 변해온 이 지역은 이번 고시 발표로 다시 한 번 개발과 보전의 갈림길에 섰다.

이번 변경의 배경에는 좌초된 사업성과 회생의 논리가 깔렸다. 종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70m 이하로 묶인 기존 계획은 낮은 분양성과 임대수익으로 사업이 장기 표류하며 사실상 중단됐다. 이에 서울시는 ‘녹지생태도심’이라는 새로운 도시 비전을 내세워 밀도와 높이를 완화하고 공공성 회복을 명분으로 세운상가 철거와 공원화를 추진한다. SH공사가 주도하는 이 사업은 종묘에서 남산까지 녹지축을 연결해 서울 도심의 생태망을 복원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도심 생태축의 복원이라는 취지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과정의 정당성과 국제적 기준에 대한 검토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건축계에서는 이미 국제설계공모를 통해 당선안이 확정되고 실시설계와 관리처분계획 인가까지 마친 사업을 행정적으로 뒤집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가유산청 역시 종묘의 세계유산 경관과 시야 축 훼손 우려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도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며 ‘보전 우선 원칙’에 따라 사업을 재검토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서울 도심은 개발과 보전이라는 두 원칙 사이의 고전적 질문 앞에 선 셈이다. 그렇다면 이 대립을 푸는 제도적 장치는 가능할까.

프랑스의 ‘말로 법’(Loi Malraux)은 그 답을 보여준다. 이 법은 역사적 건축군이 밀집한 도심을 보존 구역으로 지정하고 각 구역마다 영구적 보존·활성화 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한다. 핵심은 단편적인 건물 단위 보호가 아니라 ‘도시적 맥락’ 전체를 조화롭게 복원하는 데 있다. 파리는 이 법을 통해 역사 도심은 국가 정체성을 대표하는 구역으로 강하게 보존하고 경제·비즈니스 기능은 신도시로 이원화해 고밀 개발을 허용했다. 즉 성장은 신도시에서, 기억은 구도심에서 이뤄지는 셈이다.

하지만 보존 정책에는 언제나 손실이 따른다. 그래서 말로 법의 중요한 전제는 ‘보상’이다. 보존구역 내에서 개발을 제한당하는 토지·건물 소유자에게 세제 감면, 장기 수리비 지원, 혹은 다른 형태의 개발이익 보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지키는 이 균형장치가 없으면 도심 보전은 이상에 그치게 된다.

이 맥락에서 주목할 제도가 ‘용적률 이양제’, 즉 개발권 양도제(Transfer of Development Rights, TDR)다. 이는 미사용 용적률을 인근 혹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개발 억제지와 개발 촉진지 모두가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미국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 그 대표적 사례다. 1970년대 TDR 제도가 도입되면서 터미널은 낮은 용적률의 남은 개발권을 인근 사업자에게 매각해 유지비와 개선 자금을 확보했고 개발사는 그 권리를 통해 초고층 건설을 실현할 수 있었다. 역사적 건축물은 지켜졌고 경제적 활력은 유지됐다.

서울에도 이 논리를 적용할 여지가 있다. 세운상가 구역은 공원화 계획에 따라 개발 밀도를 낮추되 남은 용적률을 용산 국제업무지구(IBD) 등 고밀 개발지로 이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운은 보존·재생 중심지로, 용산은 글로벌 비즈니스 거점으로 역할을 나누는 ‘이원화 전략’이 가능해진다. 파리의 말로 법과 뉴욕의 TDR을 결합한 이 방식은 서울형 도시균형 모델로 발전할 수 있다.

도시의 본질은 끊임없는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그 속에 역사적 층위를 새겨 넣는 일이다. 세운4구역 논쟁은 단순한 재개발 이슈를 넘어 서울이 어떤 도시적 기억과 가치 위에 서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개발도, 보전도 일방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균형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그 답을 서울이 내놓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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