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이지은 기자] “삶의 모든 순간이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도전 속에서 정의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내외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1962년 고등고시 행정과(14회)에 최연소로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 사법과(16회)에도 합격하며 주목받았다. 송 전 소장은 “국가시험을 통해 객관적 증표를 받고 싶었다”며 당시의 배경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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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합격 후 사법연수원 전신인 사법대학원에서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대학 때 배웠던 것과 내용이 중복돼 수업에 빠진 채 총무처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21살 때였다. 사무관 월급 6900원과 사법연수원생 자격의 월급 3300원을 동시에 받았다. 여기에 아버지께서 “절대 남에게 신세 지지 마라”며 월급만큼 용돈도 주셨다.
- 이후 공무원도 법조인도 아닌 교육자의 길 선택한 이유는.
=군 영장이 나와 총무처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입대했다. 제대 후 미국에 유학차 건너갔다가 1971년 귀국했을 때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공직자의 길 외에도 판검사도 대상이었다. 미국 월스트리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무를 쌓은 것도 내가 거의 최초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변호사를 개업할 수도 있었다. 사실 변호사를 했다면 지금의 대형 로펌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루는 장인(김상협 고려대 총장, 국무총리 역임)이 교수를 권했다. 한국이 해양 국가로 주도권을 잡으려면 해상법과 보험법 및 국제거래법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상사법 체계를 크게 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수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가만 생각하니 변호사나 판검사는 사건이 터진 뒤 사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직업인데 개인적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적 기여를 하고 싶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에 지원서를 냈지만 1분도 안 돼 거절됐다. 학장이 이미 임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학 중 고시에 합격하고 미국에서 최고 학위까지 성취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1년을 놀다가 서울대 교수 제의를 받았고 그 이후로 35년을 지냈다.
- 아시아 최초로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으로 재직했다.
=1998년 7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UN 외교회의에서 ICC의 설립 근거가 된 로마규정이 채택됐다. 우리나라는 2002년 로마규정을 비준해 바로 재판관을 선발해야 했다. 외교부 주관으로 재판관을 선발하겠다고 할 때 난 교수직 은퇴 후를 준비 중이었고 지원조차도 안 했다. 아내와 함께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당시 심사위원장이 지원을 권유했다. 3번이나 거절했지만 결국 대상 명단에 올라갔고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ICC소장 선거 전 각국의 외교 공세가 쏟아졌을 텐데.
=각국별로 만나며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당시 우리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아 사비로 해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각국에서 선출된 재판관 18명을 투표로 결정하는데 당시에 난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소장 취임 후 ICC를 들여다보니 신생 기관이라 체계가 부족했다. 그래서 재판 절차의 효율성과 공정성을 높이고 법정을 전산화하며 인사제도 등 조직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재판관마다 연구관을 배치해 업무 효율성을 높였고 ICC 건물 설계와 완공까지도 주도했다. 틈틈이 아프리카 국가들을 방문하며 전쟁 피해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피해자 신탁기금을 풀어서 피해자들을 구제했으며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썼다. 귀와 코가 잘린 피해자들, 강간 피해로 고통받는 여성들 등 비극적인 현실은 내게 국제법과 인권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계기였다.
- 소장직 연임에도 성공했다.
=한 3년 하고 나니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더라. 건강도 나빠졌다. 그래서 아내와 여행 가려고 표도 다 끊어놨는데 재판관들이 한 번 더 희생하라고 반강제 하면서 연임됐다. 덕분에 여행 비행기표와 호텔 값도 다 날렸다.
-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ICC 직원 4명이 리비아 현지에서 억류된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리비아 혁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을 때였다. ICC는 카다피 집권 시절 반대자를 대량 학살한 혐의 등으로 사이프 알 이슬람(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의 신병을 확보하고자 변호사 등 ICC 직원 4명을 파견했는데, 리비아 당국이 간첩혐의로 우리 직원들을 구금했다. 직접 현장으로 날아가 나흘 만에 직원들을 석방시켰다. 당시 민병대와의 대치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죽더라도 70살이 넘은 내가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나섰다. 민병대장이 총을 들고 협박하던 순간에도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갔고 결국 그들의 신뢰를 얻어냈다. 특히 그들의 의심과 적의를 풀기 위해 한국전쟁과 4·19 혁명 같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들려주며 동질감을 강조했다. 구속된 직원들이 풀려나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눈물로 기쁨을 나눴다. 이 사건은 내게 국제법 협상의 기술과 인권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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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있는 조상을 가진다는 것은 영광이지만 정말 큰 부담이다. 자유당 시절, 정치와 일절 관계가 없는데도 아버지와 나는 늘 미행과 감시를 당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친구를 많이 못 사귀었다.
할아버지는 굉장히 포용적인 분이었다. 항상 “홍역 마마 때문에 얼굴이 얽은 여자도 잘 들여다보면 예쁜 구석이 있다”고 하시며 사람을 품었다. 본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해방 후 박헌영의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민주당이 조직되고 수석총무(현 당대표)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했다. 그때 박헌영의 공산당만 아니면 된다는 기류가 형성되면서 사회주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도 할아버지의 넓은 포용력 때문에 모두 한국민주당에 참여했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 총리직을 포함해 여러 관직 제안을 받았다. 왜 모두 거절했나.
=국무총리, 장관, 수석, 대법관, 헌법재판소 재판관 자리까지 합치면 10번은 넘게 제안받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단호하게 “턱도없는 소리 하지말라”고 끊어버렸다. 아마 이런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왜냐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 역사에서 정치적 암살의 최초 사례였다. 어린 나이에 피가 콸콸 흐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어머니가 빨래하려고 쌓아놓았던 홑이불로 피를 닦던 모습을 보며 아버지와 맹세했다. “절대로 정관계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쳐다보지도 않겠다.” 부자간 금석맹약을 했다. 기업인 아버지도 장관직을 권유받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직함은.
=교수라는 호칭은 제 분수에 맞고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적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 지금도 서울대 명예교수로 남아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윤석열 전 대통령, 한동훈 전 국민의힘 당대표 등도 제자다. 이같이 법조인들의 정계 진출이 늘고 있다.
=법률을 열심히 배웠으면 행정 사법 입법부에 가서 배운 대로 정의와 공정을 위해 일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가끔 그게 그렇게 되지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 사법부 독립성과 관련된 최근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법부의 독립성을 외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하곤 했다. 대통령조차 재판받고 처벌받을 수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한국 사법부는 매우 독립적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 자랑스러운 설명을 멈췄다. 특히 돈의 액수가 거론되는 것은 물론 정치적 사건들이 사법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사법부가 정치적 압력이나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후학들에게 항상 말한다. “법학은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정의와 공정성을 실현하는 도구”라고. 법조인들이 이 점을 잊지 않고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던 일은.
=결식아동 지원 사업과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재단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어린이를 위한 권리 보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유니세프 활동 외에도 베트남 전쟁 당시 태어난 라이따이한 문제 등 다양한 국제적 봉사 활동에도 참여했다.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이며 그들의 권익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 마지막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는 법학과 진학을 옛날식 관존민비 사상의 탓인지 지나치게 선호하는 풍조가 있다. 부모들은 우수한 아이가 태어나면 대부분 법학과 진학을 권한다. 하지만 모두 법학과만 가면 AI(인공지능)는 누가 하고 반도체는 누가 하겠나? 다양한 분야로 골고루 퍼져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라”라고 꼭 말하고 싶다. 사회적 기대나 부모님의 바람보다는 자신의 열정과 가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송상현 전 교수 △1941년생 △서울대 사법대학원 △서울대 법학부 교수 △美 플로리다대 플로리다대 법과대학 교수 △美하버드대 법과대학 교수 △국제형사재판소 ICC 재판관 △국제형사재판소 ICC 소장 △美 뉴욕대 법과대학 교수 △제2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사법연수원 운영위원회 위원장